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히텐슈타인 (문단 편집) == 역사 == 이 지역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직할영지였으나,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한스 아담 1세]]가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셸렌베르크 남작령(Herrschaft Schellenberg, 1699)과 황제 직할 영지인 파두츠 백작령(Grafschaft Vaduz, 1712)을 매입하여 합쳤다.[* 당시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이미 현재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체코 등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전부 다 누군가의 봉신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제외한 주군이 없어야 하는' 제국의회 참가 자격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 뒤 17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카를 6세]]의 윤허로 공국(Fürstentum)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단, Fürst (Prince) 작위는 1608년부터 칭하고 있었다.] 이렇게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얻은 영지였고, 땅부자였던 과거 [[리히텐슈타인 가문]] 입장에서는 제국의회를 제외하면 크게 부유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영지였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 가문원 중 1818년까지 공국을 방문한 이는 없었다. 재위 중인 [[리히텐슈타인 공]]이 처음 방문한 해는 1842년이였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프랑스 혁명 전쟁|혁명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봉신국으로서 참전했다. 당시 [[리히텐슈타인 공]]은 [[황제군|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였으며, 그는 기병 2,000기를 이끌고 보병 7,000여 명 규모의 일개 군단을 격파하는 무쌍을 벌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가, [[1806년]]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등, 이리저리 돌다가 [[1866년]] 정식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 무렵의 군주인 요한 2세(별명은 "선량공 요한(Johann II der Gute)")는 70년 간 재위하면서(1858~1929년) 유럽 주권국의 군주 중에선 [[실제로 장수한 군주|세 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첫 번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두 번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까지 합치면 순위는 한참 내려간다.] 본래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하인 탓에, 1867년의 [[대타협]] 이후로도 리히텐슈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화폐를 사용하고 총리를 비롯한 주요 각료에 [[오스트리아인]]이 임명되고,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도 [[빈(오스트리아)|빈]]에 거주하는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후국에 가까웠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오스트리아는 아예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1921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며 이전([[1852년]])에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관세동맹을 폐지하고, 새로이 스위스와 관세동맹 ([[1919년]])을 맺고 [[스위스 프랑]]을 기본통화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를 병합]]한 1938년 이후로는 공가도 리히텐슈타인에 살게 되었다. 당시 공비 (프란츠 1세의 후처) [[https://en.wikipedia.org/wiki/Elisabeth_von_Gutmann|엘리자베트]]가 '''[[유대인]]'''이라 [[빈(오스트리아)|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현존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제후국'''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국이었으나, 당시 [[리히텐슈타인 공]] 프란츠 1세의[* 정확히는 프란츠 1세는 반나치 정책을 시작한 대공이다. 그는 [[1938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사망했다. 그가 죽고 대공위에 오른 프란츠 2세는 아버지의 반나치 정책을 그대로 승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도 리히텐슈타인의 나치 탄압은 지속되었다.] 비 엘리자베스 폰 구트만이 유대계이었기에 나치를 매우 경계했다. 그래서 보호국인 스위스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군비를 크게 늘려 군인 숫자가 리히텐슈타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500여명(...)까지 늘어났다. 한편 [[독일어권]] 국가인 특성상 이웃나라인 오스트리아가 전간기에 그러했듯이 [[대독일주의]]가 유행하면서 나치 독일에 편입하자는 ‘국가연합당’이 많은 지지를 얻게 되나 상술했듯이 공비가 유대인인 관계로 대거 탄압당하고 해산되었다. 여하튼 나치에 적대적이었으나 중립국인 스위스와 연계된 것도 있고 워낙 규모가 작아서 나치를 탄압하든 말든 딱히 큰 영향이 없어서인지 다행히도 독일의 침공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1945년 종전 이후 [[https://ru.m.wikipedia.org/wiki/Хольмстон-Смысловский,_Борис_Алексеевич|보리스 스미슬로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https://en.m.wikipedia.org/wiki/First_Russian_National_Army|제1러시아국가군]][* [[러시아 해방군]]이 아니다. 본래 이들은 [[소련군]] 출신 포로가 아닌,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 국방군]]에 자원한 백계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개별 집단으로, '''특별사단 [[러시아|루슬란트]]'''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나 1945년 3월 10일 제1러시아국가군으로 승격된다. 이후 4월 4일에는 독일군 소속이 아닌 독립된 동맹군대로 승격되지만 당연히 명목상일 뿐이었다. 커뮤니티에서도 이들을 러시아 해방군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나무위키에서 나온 잘못된 정보다.] 500여명이 망명을 신청하게 되는데, 왕정 국가라 나치보다도 공산당이 훨씬 싫었는지 소련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들의 망명을 전원 받아준다.[* 이는 2차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인도 요구를 무시한 유일한 사례이다.] 한편 제1러시아국가군 소속 군인들에게는 리히텐슈타인에 귀화하기, 남미 등 중립국으로 떠나기, 그리고 [[자살|소련으로 가기]]라는 세 선택지가 제시되었는데 지휘관인 스미슬로프스키 장군을 포함한 소수는 리히텐슈타인에 남고[* 귀화를 선택한 스미슬로프스키는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독일 연방군]] 육군참모총장 고문을 지낸 다음 1988년 9월 5일 리히텐슈타인의 수도 [[파두츠]]에서 천수를 누리고 만 90세에 사망한다.] 200명 정도는 소련으로 가기를 택했으며 나머지는 중립국행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련으로 가기를 원한 200명은 불행하게도 헝가리에서 즉결처형당했다. 한편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체코슬로바키아]]에 1,600㎢가 넘는 [[영지(역사)|영지]](리히텐슈타인 영토의 열 배, 트로파우 공국)를 가지고 있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가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면서 모두 상실했다. 게다가 나치가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거처를 리히텐슈타인으로 옮겼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독일계를 쫒아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공가의 영지인 현재의 리히텐슈타인으로 거주지가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 리히텐슈타인은 [[체코]] 및 [[슬로바키아]]와 외교 관계가 없었다가, [[2009년]] 뒤늦게 수교했다. 그러면서 영지를 반환하라고 재판까지 갔지만, 패소했다. [[https://m.yna.co.kr/view/AKR20200226181800088?section=international/all|#]] 그리고 [[유럽인권재판소]]에서까지 다투게 된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828384?sid=104|#]] 대량의 영지를 상실하고 리히텐슈타인만 남게 되자, 원래 농업 외에 별다른 산업이 없었던 리히텐슈타인 경제상황 때문에 공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동안 대대로 수집했던 예술품을 내다 팔아서 연명해야 했다. 하지만 [[돈세탁]]에 손을 대면서 지금은 굉장히 부유해졌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종가]]는 [[오스트리아]]에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한 저택으로 어지간한 궁궐보다도 크다. 이 저택은 리히텐슈타인의 양외지[* 특정 국가가 타국 영토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의미한다.]로 관리자가 [[리히텐슈타인 공]] 본인 앞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상당 부분 외부에 개방되어 관광명소로 유명하다고. [[리히텐슈타인 공]]이 1년에 두 번씩 종가에 방문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는 공가에 관광객은 방문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