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장쉐량의 대응 === 당시 장쉐량은 30만의 정규군과 18만명의 비정규군을 거느렸고 중국 군벌 중에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갖춘 공군도 있었다. 게다가 [[선양시|펑톈]]의 병기창은 2만 5천명의 근로자들이 150문의 대포, 20만발의 포탄, 1천정의 기관총, 6만 자루의 소총, 1억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반면 관동군은 1만 5천명에 불과했으니 단순 숫자 대비로만 해도 대략 50만 대 1만의 싸움이었다. 숫자도 많고 질도 중국 군벌들 중에서 수준급인 동북군이 이 상황에서 질리가 만무했다.[* 후의 중일전쟁의 사례만 봐도 무장이 잘 갖춰진 중국군은 항전의지가 뒷받침되는 상황에서 일본군과 1대 1에 가까운 전사자 교환비를 내는 성과를 냈으며 미국의 본격적 지원이 시작된 후반에는 중국군 1대 일본군 3의 교환비를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는 10대 1까지 털리기도.... 전체적으로는 5대 1정도다. 토벌 당한 팔로군들은 미포함이기 때문에 이들까지 고려할 경우 더 큰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장쉐량이 측근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군을 톈진, 베이핑에 주둔시키고 있었단 것이었다. 무엇보다 장쉐량은 일본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줄까봐 두려워했다. 만약 일본이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해온다면 장쉐량이 이길 리 만무했고 그렇다면 장쉐량은 기반을 모조리 날리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장쉐량은 일본이 [[그그실|만주를 통째로 점령할 야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간 일본군이 도발을 해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이번 도발 역시 그러한 도발의 일환 정도로 본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 외무성이 영토 야욕이 없으며 만철을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출병 운운하며 장쉐량의 오판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사실 일본이 왜 쳐들어왔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이 만주를 아예 병탄하기 위해 쳐들어왔다고 확신한 것은 1931년 11월 치치하얼이 함락된 이후였다. 장쉐량은 베이핑의 미국 병원에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급보를 받고 회의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난징 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건의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9월 19일에는 외교관 [[구웨이쥔]]과 만나 대책을 논의했는데 구웨이쥔은 국민정부에 연락을 취하여 국제연맹에 본 건을 제소하는 한편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속히 회담할 것을 제안했다. 구웨이쥔은 냉정한 국제외교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국제연맹에 조금도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원론적인 입장에서 일단 제안했고 그것의 효력을 의심하였기에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도 제안했지만 장쉐량은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은 거부했다. 이날 장쉐량은 국민정부 대표 [[장췬]]과 [[우톄청]]을 만나 만주사변에 관해 국민정부에 보고했다. 9월 23일 장쉐량은 동북변방군 사령장관 공서와 요녕성 정부를 금주로 이전시키고 26일 휘하의 동북군에게 이번의 무저항주의는 사변을 국제공판에 맡기기 위해서라고 변명했으나 장쉐량의 무저항 지시에 저항하고 있던 많은 동북군 부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관동군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쉐량과 원수지간이 된 만주 구파는 관동군의 회유에 미운 상전인 장쉐량을 팽개치고 즉각 일본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니, 대표적인 것이 훗날 만주국 수상까지 하는 당시 동삼성 특별장관 [[장징후이]]와 지린성 주석대리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위안진카이]], [[장하이펑]] 등이었다. 장쉐량에게 충성하던 장쭤샹과 완푸린, 왕이쩌(왕이철) 등은 베이핑으로 달아났다. 외교적 대응의 경우에는, 구미 열강들이 현명한 대응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이미 난징 정부조차 이것이 별 소용이 없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후 리턴 조사단의 결정을 일본이 씹어버리고 국제연맹 탈퇴를 강행한 막장 행위를 본다면 난징 정부의 예상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미 장쉐량 본인이 난징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걷어찬 바가 있었지만 가령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하더라도 난징 정부의 수장 장제스 역시 이미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내부의 갈등에 휘말려서 장쉐량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장쉐량의 대응은 여러모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장쉐량은 후일 죽은 뒤까지 '''부저항(不抵抗)'''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이런 장쉐량의 대응에 대해, 애초에 당시 장쉐량 본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장쉐량은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쳐서 상황을 판단할 능력도 떨어진게 아니냐는 것. 장제스는 [[제3차 초공작전]]으로 공산당과 싸우던 와중에 후한민을 감금한 [[탕산 사건]]에 반발한 광둥 군벌들이 광저우 국민정부를 세우고 일으킨 반란인 [[1차 양광사변]]을 맞아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만주사변을 보고받았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독단적으로 협상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왕징웨이에게 나라를 위해 내전을 중지하자고 제안하며 광저우 국민정부와 싸우던 병력을 북상시키고 9월 20일, 3차 초공작전도 중지하고 군대를 북상시켰다. 또한 일본 외무성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정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비난만 하였고 일본에게 광둥 정부를 지원하면 만주 점령을 승인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일본에선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