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관동군의 북만주 공략 === 9월 23일 장쉐량은 장제스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협상하려 했지만 관동군은 만주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10월 15일, 투항한 동북군들을 앞세운 관동군이 치치하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 성 성장 완푸린은 달아났고 장쉐량은 [[마잔산]]에게 치치하얼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11월 4일 넌장 강 철교에서 마잔산은 일본군을 습격하여 섬멸했고 이에 온 중국이 고무되어 마잔산을 군신으로 칭송하였다. 하지만 마잔산은 1만 3천명의 병력과 30문의 대포밖에 없었는데 반면 일본군은 각종 전차를 앞세우고 진격해왔고 결국 마잔산은 패주하고 만다. 11월 9일에 치치하얼이 함락되었고 마잔산은 중소 국경 지대에서 항전하였다. 그나마 마잔산 정도가 일본의 침략에 저항다운 저항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만주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만다. 한편 국제연맹의 대응이 지지부진한 것과 관동군의 도를 지나친 공격을 지켜본 장쉐량은 그제서야 맞서 싸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베이핑에 주둔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 시작했고, 만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5만명의 병력으로 진저우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을 난징 정부는 전폭적으로 지지하였고 장쉐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저항을 호소했지만 너무 늦은 호소였다. 관동군은 진저우 함락이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진저우를 공격하려 했다. 국민정부는 진저우 사수와 포기를 놓고 분열되었는데 국민혁명군 참모장 [[주페이더]]와 [[다이지타오]]는 철수 후 협상을 주장했고 [[구웨이쥔]]은 사수를 주장했다. 그런데 관동군은 생각지도 못한 우군을 만나게 된다. '''다름아닌 화북 군벌들이었다.''' 장쉐량이 진저우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한 것을 본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군벌들은 즉각 장쉐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이핑이 위험에 처하자 장쉐량은 진저우 주둔군을 롼저우로 철수시켰지만 갑작스러운 철수와 혼란한 전황 속에 결국 동북군은 와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가 [[조선군(일본제국)|조선군]] 20사단에게 함락되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하얼빈도 1932년 2월 5일 일본군 2사단에게 점령되었다. 그렇게 [[만주국|만주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