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망덕사 (문단 편집) == 역사 == [[황룡사]]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듯, 어지간한 역사가 있는 절들 대부분은 그럴듯한 전설이 전하지만, 망덕사 창건설화는 좀 기이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70년 [[나당전쟁]]이 발발해 신라와 당나라가 대립했고, 670년과 671년에는 당나라 수군 함대가 [[폭풍]]으로 침몰하는, 훗날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승려]] [[명랑]]대사가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 비법이라는 주술을 행하여 일으킨 신이라고 설명한다.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에 따르면 곽행절(郭行節)이 나당전쟁에 참전했다가 671년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설명하므로, 실제로 폭풍이 불어 당수군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도 실제로 [[태풍]]이 불었는데 그 태풍에 신의 바람이라는 의미를 가져다붙인 것이므로 비슷한 사례라 하겠다.] 당나라는 신라 사신 [[김인문(신라)|김인문]]과 박문준(朴文俊) 등을 나당전쟁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 [[당고종]]이 박문준을 문책해 묻자 박문준이 아래와 같이 답했다. >저희 신하들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사정을 모릅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들었을 뿐입니다. [[신라|우리나라]]가 [[당나라|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경주 사천왕사지|천왕사]]를 창건하여 [[당고종|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래도록 법석(法席)[* 승려를 모시고 설법이나 독경 등을 하는 규모가 큰 불교행사. 여기에서 [[야단법석]]이란 말이 나왔다.]을 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당시 전쟁 중이었으므로 얼핏 생각하면 위 대사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옛 [[백제]] 땅([[웅진도독부]])과 옛 [[고구려]] 땅([[안동도호부]])에서 당나라를 쫓아내고 한반도는 신라 영토라고 당나라에게 인정받은 뒤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설오유|선빵을 쳐놓고도]] 계속 사죄사를 보내는 등 당나라를 여전히 명목상 상국으로 받들었다. 물론 당나라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이없는 기만이었겠지만 명분상으로는 그랬다. 나당동맹의 약속을 취리산 회맹 등으로 먼저 어기고 뒷통수를 친 쪽이 당나라기도 했고. 아무튼 [[당고종]]은 악붕귀(樂鵬龜)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박문준이 말한 절이 정말로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절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사천왕사는 실제로는 당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절이므로 당나라의 조사를 받으면 들통날 것이 뻔했기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사신 악붕귀에게 보여주기용으로 미리 사천왕사 남쪽에 새 절을 날림으로 지었으니 바로 망덕사다. 예상대로 악붕귀는 오자마자 먼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천왕사에 들르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악붕귀를 망덕사로 인도해 보냈더니, 그도 뭔가 미리 입수한 정보가 있는지 망덕사의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악붕귀에게 금 1천 냥을 주어 매수했고(...) 그 사신은 본국에 돌아가 당고종에게 황제의 수명을 축하하는 절이 맞더라고 거짓 보고를 올린 덕에 무사히 넘어갔다. --돈 주고 매수할 거면 절을 새로 지을 필요도 없었지 않을까--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란 말은 의미가 불확실하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기사립어문전왈其使立扵門前曰 불시사천왕사不是四天王寺 내망덕요산지사乃望德遙山之寺"라고 하였다. 번역하면 【그 사신(악붕귀)은 절의 문 앞에 서서 "(이곳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의 절乃望德遙山之寺이다." 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망덕요산지사(望德遙山之寺)'란 부분을 '망 / 덕요산지사'라고 띄어 읽어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만약 덕요산이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가 있는) 경주 [[낭산]]을 가리킨다면, 삼국유사의 해당 구절을 【그 사신(악붕귀)은 절의 문 앞에 서서 "(이곳은) 사천왕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낭산(덕요산)의 절(사천왕사)을 바라보았다.】라고 다르게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의 치명적인 약점은 [[낭산]]이 '덕요산'이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없고, 근처에 다른 덕요산도 없다는 것. 이 해석을 따르려면 '근거는 없지만 낭산이 덕요산이라고도 불렸을 것이다.' 하는 가정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망덕요산'이라는 한 덩어리 단어로 해석하자니, '덕을 바라보는 멀리 있는 산'이란 뜻이 되어 왜 악붕귀가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망덕요산'이 어떤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망덕사를 가리키는지도 알 수가 없다. 만약 덕(德)이 중국 황제, 즉 당나라를 가리킨다면 '당나라를 바라보는 멀리 있는 산'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이러한 이유로 악붕귀가 했다는 말은 망덕사를 보고 진짜 사천왕사가 아니라고 태클을 걸었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뜻이 무엇이라고 확정지어 해석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중에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끝내고 국교를 회복하면서 망덕사는 당나라를 위한 절로 남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훗날 [[경덕왕]] 때인 755년에 13층짜리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진]]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 해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웠기에 당나라와 연관된 이 절이 거기에 감응한 것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798년과 804년에도 두 탑이 서로 부딪히도록 흔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데 사천왕사나 황룡사 같은 다른 목탑이 같이 흔들렸다는 기록은 딱히 없어서 삼국유사 기록대로 서둘러 [[부실공사]]하느라 망덕사만 더 많이 흔들렸을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