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미(태풍) (문단 편집) ==== [[마산시]] ==== >"내 육십 평생 살다가 '''육지에서 배에 치여서''' 입원해보긴 처음이다." >---- >날아온 배에 충돌해 입원한 어느 '''[[어부]]'''의 인터뷰[* 이 경우는 그래도 목숨은 건졌지만 매미 내습 당시 경상남도 남해군에서는 바지선이 해안도로를 덮치는 바람에 도로를 지나가던 승용차의 운전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거대한 태풍의 강력한 풍속과 낮은 기압은 [[마산시]][*마] 해안가에 궤멸적인 상처를 남겼다. 기압 때문에 부풀어오른 바닷물이 만조와 강풍이 겹쳐 '''5m짜리 거대 [[해일]]'''을 몰고 왔던 것. 해일은 부두를 넘어 해안가에 있는 아파트단지와 상가의 지하주차장들을 휩쓸었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 아파트는 '''2층'''까지 물이 차올랐으며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경남대학교|경남대]] 앞 댓거리는 '''부두로부터 1.2km나 떨어진 내륙'''인 곳이었다. 이 곳은 100년 전까지 바다였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차츰차츰 매립하던 곳이었다. 옛 어른들은 정확히 매립 전 해안선까지 물이 들어온 것이라고 증언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시]] 문서를 보자. [[파일:2003매미 마산만 매립선.png]] 마산은 이 해일 때문에 수십명의 희생자를 내는 등 당시 가장 처참하게 박살났던 도시다. 심지어 이후 마산(현 마산합포구)에서는 20세기 중반에 퇴출된 터돋움집이 21세기에 부활했고 서항부두 인근에는 당시의 피해와 사망자를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http://mblogthumb3.phinf.naver.net/20120828_90/yufei21_1346122098502etLE5_JPEG/P101204010.jpg?type=w2|#]]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39o06005.jpg]] 당시 강풍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야구장]] 조명탑.[* 참고로 이 조명탑은 마산시에서 야구장 만들 때 지어진 게 아니라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롯데그룹에서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원래 마산에서 치를 예정이었던 9월 16~17일 롯데와 한화의 경기는 급하게 [[사직 야구장|사직]]으로 옮겨서 치렀다고 한다. 이외에도 해안가 쪽 아파트들은 대부분 전면부 통유리가 파손되었는데 강풍대가 지나간 시간은 밤 9시부터 11시경까지 고작 2시간에 불과했다. 조금 달리 말하자면 '''고작 2시간만에 도시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이다.''' 대우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마산점)도 태풍으로 인한 침수로 인해 지하매장이 물에 잠겨 운영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한동안 지상매장만 운영하다가 이후 다시 복구되어 운영 중이다. 전기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복구되었지만 식수는 거의 하루동안 복구되지 않았고 심한 곳은 '''사흘 뒤에야'''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배수펌프나 [[인프라]] 등도 전부 침수되어 버렸기 때문. 이 기간 동안 댓거리 지역 주민들은 도시 한가운데의 사막을 경험하였다. 원래 갯벌이었던 곳을 매립하여 만든 마산자유무역지역(구 수출자유지역)도 큰 피해를 봤다. 대부분의 공장 및 사무실 건물 1층이 물에 잠겼고 물류창고 또한 파도에 휩쓸렸다. 당시 자유무역지역에 당직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파도가 밀려와서 도망치려 했는데, 다리가 물에 잠겨서 이동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던 ○○회사 옥상에 주변회사 당직 근무자들이 모두 모여서 가족들에게 전화하기에 바빴다. 3시간쯤 있으니까 물이 빠졌는데, 바닥에 하얀 벽돌 같은게 굴러다니더라, 내려와서 자세히 보니 휴대폰들이었다."[* 당시 노키아가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입주해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노키아 TMC]] 참조. 노키아 창고가 파도에 휩쓸리면서 떠내려온 물품들이다.] 라고 한다. 당시 마산자유무역지역 당직 근무자들은 그 비싼 [[노키아]] 휴대폰이 박스포장 그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고..[* 대다수가 GSM&EDGE를 사용하는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들이었으니...][* 당시 텔슨전자가 하청한 제품들만 CDMAOne과 CDMA2000 1xRTT였다. 문제는 1년 뒤에 부도났지만.. 8년 뒤에야 WIPI 의무탑재가 폐지되고 GSM을 기반으로 하는 3세대 이동통신 규격인 WCDMA가 도입되면서 대한민국에서도 출시될 수 있었다.] 또 [[1997년 외환 위기|IMF]]를 견뎌낸 수많은 경영인들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분투를 벌였고 테이프로 사무실 문을 밀봉하고 모래주머니나 고무타이어 등을 쌓아 임시 [[방파제]]를 꾸리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건물 2~3층 높이까지 차오르는 파도 앞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기계 부품 공장을 경영하던 한 경영인은 >"테이프로 유리문 틈틈을 막아 사무실을 밀봉하고 당직근무자들에게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일단 차를타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고있는데, 회사를 나온지 20여분 정도도 되지 않아서 전화 한통이 왔다. 회사에 물이 차고 있다는 당직근무자의 연락이었다. 일단 회사를 빠져나오라고 했는데, 20분 그사이에 다리가 물에 잠겨서 나갈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밖이 더 위험하니 일단 회사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또 20분쯤 있다 전화가 왔는데, 책상 높이까지 물이 차서 컴퓨터가 다 죽었는데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 만만한 태풍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일단 다 포기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라고 얘기했다. 다음 날 한 차례의 파동이 지나가고 공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군경이 정문다리를 통제하고 있어서 후문으로 갔는데, 이쪽은 소방관들이 통제하고 있더라. 3시간쯤 있으니 통제가 풀려서 회사에 들어갔는데 바닥에 노키아 전화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가니 먼저 온 다른 직원들이 50cm 가까이 쌓인 모래들을 삽으로 퍼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물에 홀딱 젖어 녹초가 된 당직근무자가 앉아있었고, 가서 괜찮냐고 말을 걸었다. 그 근무자는 "막연히 안전한 곳이라고 하면 어카요! 안전한 곳이 어딘지 알려줘야지!"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며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노키아 ([[노키아 TMC]]) 언급은 당시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공통으로 증언하는 부분이다. 인상적이긴 인상적이었던 모양. 당시 마산의 궤멸적인 피해로 인해 군부대에서는 마산을 고향으로 하는 병사에게 특별 휴가를 보내주는 등 전국적으로 피해 복구에 힘썼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방문 시 특전사들이 당일 멋있게 현장 복구하러 오고 기존에 죽어라 일하던 군인들은 숨으라고 하여 예비군 동대장 중 일부가 이 군인들을 동원해 아는 지하주점을 치우게 했다는 게 당시 복구작업을 한 군인의 증언이다. 다만 복구작업에 투입되었던 다릉 39사단[* 당시에는 창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출신 군인은 "그 때는 거의 24시간 가까이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전사가 교대해줘서 굉장히 반가웠다. 그 때 겨우 쪽잠을 잘 수 있었고 나중에 시신들도 특전사 아저씨들이 건졌다."고 증언했다. 하필 추석 연휴에 태풍이 겹쳤던 터라 마산에 귀성한 많은 사람들이 차례는커녕 수해 복구에 힘을 썼다. 마산 인근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진해기지사령부]]에서 태풍경보를 내려 대부분의 함정들은 파도가 잔잔한 수역으로 피항을 갔지만 사람 팔뚝만한 강철로 만든 쇠사슬인 닻줄이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져 하마터면 침몰할 뻔한 함정들도 있었고[* [[포항급 초계함|PCC]]급이 사용하던 앵커체인이 끊어져 난리가 났다고 한다. 다행히 해군은 태풍이 오는 날이면 전투배치에 준하는 비상당직자를 배치하기에 바로 엔진을 켜고 외해로 항해해 사고는 없었다. 이후 PCC급은 태풍으로 인한 피항 시 쇳줄인 앵커체인에 더해 장력을 분산해 주는 나일론 홋줄을 하나 더 다는것으로 규정이 강화되었다.] 해군기지 부둣가는 마산처럼 해일로 인해 2층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유실되었고 쑥밭이 되었다. 진기사 내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도 수십년간 사용하던 출입로가 이때 붕괴되어 한동안 생도 및 교직원들이 출입에 불편을 겪어야 했으며[* 대한민국 해군이 [[UDT/SEAL]] 모병을 위해 만든 영화 [[https://youtu.be/QOn3PLxqeCo|해마(영화, 1995)]]에서 구 도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0:00분 경 훈련생들이 IBS 구보를 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후 무너진 부분에서 내륙 쪽으로 좀 더 들어간 위치에 왕복 4차선 도로를 새로 뚫었다. 해군사관학교 방문 행사, [[군항제]] 등 해군 부대개방 행사에서 개방되는 도로가 여기다.] 모 해군부대는 10월에 예정된 훈련을 취소하고 복구작업만 하다 보니 다음 해인 2004년으로 해가 바뀌었다는 경험도 있을 정도. 이는 인근 다른 부대들도 마찬가지여서 39보병사단 예하 연대도 2003년 가을은 대부분 대민지원에 투입되었다. 마산시 차량의 6%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마산시는 2003년 9월 24일 "해일이 몰아치면서 침수된 차량은 모두 8,061대로 전체 등록 130,753대의 6.2%를 차지한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고 밝혔다. 매립지를 중심으로 침수 피해가 컸으며 월영동이 3,255대(40.4%)로 가장 많았고 동서동이 962대(11.9%)이며 진동면 555대(6.9%), 합포동 527대(6.5%), 산호동 503대(6.2%), 봉암동과 양덕2동, 오동동이 300∼400대선, 반월동과 문화동, 구산면, 진전면이 100∼200대 선이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0488267|#]] * 2003.9.13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030913/7981732/1|[태풍 '매미' 남부 강타]바닷물 순식간에 상가지하 덮쳐]] * 2011.9.19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877|2003년 초토화된 어시장·해안 잊었는가]] * 2014.7.31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55268|매립으로 태풍피해 커졌는데, 더 매립하자고?]] * 2022.9.5 경남신문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85114|태풍 ‘매미’를 기억하십니까]] [[마산 해운프라자 침수 사고]]도 발생하였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마산 해운프라자 침수 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