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대혁명 (문단 편집) === [[4인방]]의 등장과 몰락 ===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한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비림(批林)은 린뱌오[林彪] [[안티]], 비공(批孔)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비판|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월 5일]]이 청명절(淸明節)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더 나아가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연금#s-4.1|가택연금]]되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 장칭 평전의 번역.] 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화궈펑]]은 4인방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는 실각했지만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