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군정 (문단 편집) === 남조선과도정부 ===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정부)] ||<-3> '''{{{#fff {{{+1 남조선과도정부}}}[br]南朝鮮過渡政府 |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 ||<-3> '''{{{#gray [[1947년|{{{#000,#fff 1947년}}}]] [[6월 3일|{{{#000,#fff 6월 3일}}}]] {{{#29166f ~}}} [[1948년|{{{#000,#fff 1948년}}}]] [[8월 14일|{{{#000,#fff 8월 14일}}}]]}}}''' || ||<-2> '''{{{#fff 성립 이전}}}''' || '''{{{#fff 이후}}}''' || ||<-2>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000,#fff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 '''[[대한민국 제1공화국|{{{-2 {{{#254170 제1공화국}}}}}}]][br][[이승만 정부|{{{#254170 이승만 정부}}}]]''' || || '''{{{#fff 사령관}}}''' ||<-2>'''[[존 리드 하지]]''' || || '''{{{#fff 군정장관}}}''' ||<-2>'''아서 러치''' ,,,/ (1945.12.18.~1947.9.11.),,,[br]'''[[윌리엄 F. 딘|윌리엄 프리시 딘]]''' ,,,/ (1947.10.30.~1948.8.14.),,, || || '''{{{#fff 민정장관}}}''' ||<-2>'''[[안재홍]]''' ,,,/ (1947.2.10.~1948.8.14.),,, || [clearfix]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 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 이는 한반도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의 '레드퍼지'(특히 [[역코스 정책]]) 이전까지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 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 측의 활동은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 ||[[파일:FB_IMG_1474741494307.jpg|width=100%]]|| ||1947년,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통역관), [[야코프 말리크]], [[테렌티 시티코프]], [[허헌]]||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 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와해됐으며[* 이때 민정관 E. A. J. 존슨에 따르면 여운형 암살 당일 미국은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직을 타진하려고 했고, 여운형 역시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문서를 지참했다고 한다.], 단독 정부 수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47년 9월에는 미국 측이 제시한 한반도 내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UN 총회에서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은 북한 지역에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인구 비례에 따른 의석 수 배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되었다. ||[youtube(1McDB1ViOGU)]|| || 1947년 서울에서의 좌-우 대립 모습을 찍은 영상 ||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수·순천 10.19 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이후 선거가 연기된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1대 국회가 수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 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1대 국회가 이승만을 위시로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과 [[한국민주당]]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같은 해 7월 12일,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같은 달 17일에 공포([[제헌절]]의 기원)했으며, 7월 20일에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을 선출하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직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행정, 입법, 사법, 외교권 등의 각종 권한들을 대한민국으로 이양하여 해산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인 찰스 핼믹은 1949년 1월 11일까지 군정장관으로 재임했고, 6월까지 정치, 군사고문을 맡았다. 이 무렵 [[김구]]와 [[이승만]]은 정부 수립 문제로 대립했는데 김구는 남북 공동 정부를,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남북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끝없이 이승만과 김일성을 설득했으나 둘 다 거절했는데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보다 훨씬 과격하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라 김구의 설득을 듣기조차 싫어했으며 오히려 [[6.25 전쟁|힘으로 부수고 남북 적화 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소련군정이 들어설 때부터 갖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이 암살 등으로 죽어야만 남북 공동 정부 수립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구는 악착같이 매달려서 어떻게든 김일성을 설득해보려고 한 반면 이승만은 현실을 받아들여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당연히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김구는 불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