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스코리아 (문단 편집) === 미스코리아 이전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111121491410001010-001.jpg]] 한국 최초의 미인 대회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다. 1931년 [[국경의 밤]]을 쓴 시인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사 삼천리가 개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으로, 사진 응모를 통해 선발하였다. 심사위원이 의외로 화려한데,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 李承萬.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는 동명이인으로, 행인이라는 호를 쓰던 삽화가이다.], 허영숙, [[나혜석]], [[김일엽|김원주]], [[최승희]]가 심미안을 갖췄다라는 이유로 선발되었다. 총 326명의 응모를 받아서 14명이 입상했다. 그중에서 1등을 특상이라고 불렀는데, 당대 여류문인 최정희의 여동생 최정원(崔貞嫄)이 선택되었다[* 인터넷에는 이걸 최정희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좀 있다.]. 최정원은 이후 카프 소속인 이갑기[* [[이효석]]이 [[조선총독부]]에 취직하자 '''"너도 개가 되었구만"'''이라고 발언해 이효석이 [[조선총독부]]를 그만두는 원인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와 결혼했는데, 결혼 몇 주만에 이갑기가 카프 참여 혐의로 체포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이후 언니 최정희처럼 소설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도 데뷔. 다음은 1940년 8월 [[일본]] 잡지사인 <모던 니뽄>이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미스 조선을 선발하였는데, [[전남]] [[목포]] 정명고등여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김영애가 선발되었다. 이후 김영애는 화가 문재덕과 결혼하였는데, 이쪽도 운수가 좋지 못했는지 [[6.25 전쟁]]때 남편이 납북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미인대회는 1949년 월간잡지 <신태양>이 미스 대한 선발대회를 개최한 것이 기원이다. 신태양은 사진 응모로 후보를 추린 다음에 명동에 그 사진을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의 투표로 미인을 선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고등학생이나 사무직 여직원 등 47명의 사진만 도착하였다. 그나마 영 아니다 싶은 경우를 추리자 7명만 남았고, 이 7명 역시 잡지에 실을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기자들에게 나가서 외모가 되는 미인들을 찾아오라고 했으니, 주 대상은 '''다방 마담들과 요정 직원들이 주가 되었다'''[* 덕분에 심사가 가관이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후보들이 담배를 꼬나물거나 치마를 걷어서 올리고 노려보는 등, 업소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20명을 채웠으니, 우승자도 역시 명동 지역 다방 마담이었던 임현숙이 선정된다. 이후 임현숙은 나름대로 연예계 생활을 좀 했다. 이 다음은 더욱 가관이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달리던 1953년 5월 피난 수도였던 부산시청 강당에서 미인대회가 열렸다. 중앙일보 주최[*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별개의 단체다.]였던 제1회 여성 경염대회(競艶大會)로 미스 유니버스에 파견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제1회라고 하지만 어차피 2회는 없었다. 이 대회의 1등은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중에 부산으로 피난온 강귀희가 차지하였는데, 이 과정도 골치 아프다. 원래 강귀희는 참가자 명단에도 없었는데, 심사위원들의 요청으로 후보가 되었다. 이 본선은 수영복 심사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수영복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공개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미인대회에서 수영복 심사한다는 소리를 듣고 인파가 많이 몰렸기 때문에 결국 모조리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다만 본선 진출자 10명으로 모아놓고 발표회만은 공개로 진행했다. [[파일:external/munjanet.net/05193.jpg]] 이 발표에서 당연히 심사위원이 초빙한 강귀희가 1등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때 명칭을 미스코리아라고 했기 때문에 강귀희를 최초의 미스코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가끔 있으나 이 대회는 공식적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포함되지 않는다.[* 강귀희는 미스 유니버스에 사정이 여의치 못해 나가지 못했다.] 이후 강귀희의 앞날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아서 유명세로 몇 년간 공부를 못하질 않나,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한국 음식점을 여네 디자인을 하네 하다가 결국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단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의 고교 1년 선배라는 이유로 [[KTX]]의 시스템 및 열차 도입 과정에서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의 로비를 담당하였고[* 결과적으로 [[KTX]] 대상 열차는 [[노태우]]가 아닌 [[김영삼 정부]] 시기에 선정되었으므로 로비는 실패.], [[개신교]]계 유명 목사와 프랑스 나비부인과의 관계를 주선하는 인물이라서 이후의 소송에서 참여했다. 그리고 1957년 5월,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한국일보 주최로 세계대회에 파견할 한국 대표를 뽑는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