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영관계 (문단 편집) === 20세기 전반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JE7oDUXh1Jw)]}}} || || [[제1차 세계 대전]] 배경의 [[1969년]] 영국 뮤지컬 영화인[br][[오! 왓 어 러블리 워]](Oh! What a Lovely War)에서 미군이 등장하는 장면[* [[Over There(군가)|Over There]]을 부르면서 당당하게 영국군 본부 안까지 행진해 들어가는 미군의 모습과 그걸 어이없다는듯이 지켜보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영국인들이 생각하던 미국의 이미지가 코믹하게 표현되어있다.] ||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기를 전후해서 강대국에 걸맞는 힘과 명성을 가지기 시작한다.[* 실제로도 미국사에 상당히 의미있는 대통령이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조지 워싱턴]]과 더불어 [[러시모어 산]]에 초상이 각인되어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그간 쌓여온 경제적 잠재력을 대백색 함대 등 군사력으로 전환하여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 [[독일]] 등의 해군력과 견줄정도로 성장시켰다.[* 이는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미 해군]]이 [[영국 해군]]과 공식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받는 배경이 된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서유럽]] 강대국들에게 미국의 힘을 보여줘서 [[서반구]]에서 쫓아낸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도 루스벨트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첫번째 루즈벨트]]는 미국을 강대국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두번째 루즈벨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셈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youtube(0EWWXQA9D48)]}}} || || 20세기 초반 전 세계의 명목 GDP 변화[br]미국이 타국에 비해 선명한 우위를 차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의 GDP가 2배 가까이 뛴다. [[대공황]] 직전에 이르면 전세계 GDP의 42%로, '''[[대영제국]]이나 [[서유럽]]전체 GDP 총합의 2배까지 달하게 된다.''']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대영제국의 규모는 비록 최대절정기를 구가하지만 끝내 미국에 추월당해 절대 패권이 흔들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미국의 기초과학이나 고급과학 산업 기술이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고 문화적인 부분 역시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중국]]처럼 덩치만 큰 나라에 불과했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미국]]은 일반적인 산업 부분에서는 뛰어난 성과도 있었으며, [[미국]]의 1인당 GDP/PPP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뛰어났던 [[영국]]을 늦어도 [[1905년]] 경에 뛰어넘었기에 인구 뿐만이 아니라 삶의 질만큼은 [[미국]]이 [[영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에 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열등감은 여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정체와 혼란을 발판삼아 미국 경제는 활황을 맞았고, 뉴욕 증시 규모는 런던 증시는 물론 유럽 전체 증시 규모를 뛰어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C3TZR1g81UNaPs7vzNXHueW5ZM76DSHWEY7onmfLxcK2iP9aWuz5TDCGDd2qnxT6Y1RUVHMkcon1tDfcR9kTX2pKxWAAKCnG6g2gFWe7adJRQTpe8TL5mki-1.png|width=100%]]}}} || || 미국과 유럽의 기업상장 시가총액 변화[*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과 [[서유럽]]의 비중이 극적으로 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대공황]] 직전엔 미국이 유럽의 2배에 달한다. 심지어 [[대공황]]으로 폭락한 시절에도 [[서유럽]]과 대등한 규모다. 미국은 대공황으로 시총이 9분의 1토막 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비율이라는 것은 '''[[미국]]의 [[대공황]] 여파가 유럽의 시총 역시 4분의 1 수준으로 토막냈다는 뜻이다!''' 또, 시총의 투기성 거품을 제거해도 미국 기업들의 자산 규모가 유럽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의 경제의 선두주자가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음을 상징한다. ] || 사실 시가총액 거품이 지나치게 있지 않는 경우[* 외국계 기업들이 지나치게 많이 상장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 나라 경제적 국력을 보여주는데 GDP보다 더 유용한 지표일 수 있는데, 나라의 국력기반인 기업의 유망성과 실력이 수치로서 표현된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뉴욕시|뉴욕]]은 [[런던]]의 위상에 도전하게 된다.[* 정확히는 양분한 것에 가깝고, 단지 [[뉴욕]]의 금융파이가 [[런던]]의 금융파이보다 커졌다 라고 보는게 더 맞겠다. 수백 년간 쌓여있던 전통적 위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당장 오늘날에도 [[런던]]은 [[뉴욕시|뉴욕]]과 함께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95a0c11242d1934af4fedc0e1478082f.jpg|width=100%]]}}} || || 화폐위상, 세계인들과 각국 정부에서의 기축통화 위상의 변천[br]global public debt, foreign exchange reserve currency./글로벌 외환보유 준비통화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80%에 가깝게 유통되던 절대적인 [[기축통화]]인 [[파운드 스털링|파운드]]의 위상과 지역 내 통용 화폐에 불과했던 [[미국 달러]]의 위상이 전쟁 발발로 인해 크게 좁혀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거의 양강체제를 구축하면서 1920년대 중반에 역전됨을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금보유량이 상당 부분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점도 있고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대세가 미국으로 급격히 기운다. [[1925년]]에 영국은 금본위제로 복귀하지만 이미 한풀 꺾여버린 [[영국]]의 위상과 신용, 부상한 [[뉴욕]]과 [[미국 달러]]의 대세는 되돌릴 수 없었다. 전비로 [[영국]]이 휘청이고 [[미국]]이 급성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변화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1944년]] 이전까지는 굳건했던 [[대영제국]]의 영토, 국제적 위상과 아직은 건재한 [[영국]]의 경제, 문화, 외교, 군사력 등으로 인해 [[파운드 스털링|파운드]]도 나름대로 위상을 유지하였고, [[파운드 스털링|파운드]]의 사용에 대한 관성, 이 시절 미국의 국력이 [[1940년대]]부터 이어져오는 진정한 의미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과 국력에까지 미치던 시기는 아니였기에 오히려 경합 상황에 가까웠고, 결국 [[1944년]] [[브레튼 우즈]] 협정을 통해 [[미국 달러]]가 확실한 승기를 잡으면서 현재의 기축통화 체제가 형성된다.[* 원래 독보적인 [[기축통화]]로 불리려면 오늘날의 [[미국 달러]]와 [[유로]]처럼 2등 통화의 2배 이상의 보유량은 나와야 한다.(달러: 60~70% / 유로: 20%)그 이하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뜻이고, 환율변동이나 다른 요인들로 비중의 차이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 이런 관점으로 볼때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도 [[파운드 스털링]]은 [[미국 달러]]와 더불어 핵심 화폐 역할을 지켰다. 그 시절까지도 [[파운드 스털링]]을 들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졌었다는 뜻이다.심지어 [[브레튼 우즈]] 협정기간에도 초기에는 달러와 더불어 파운드도 기축통화로 정하는 안이 제기되었었다. 그만큼 세계인들의 인식 속에서 [[파운드 스털링]]에 대한 신뢰도, 즉 [[영국]]의 위상이 그 시절까지도 굳건했음을 보여준다.사실 이 순간까지도 [[영국]]은 [[대영제국|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1919~1944년은 이 때문에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우위라기보다는 [[미국 달러]]와 [[파운드 스털링|영국 파운드]] 양강의 시기,화폐 패권 이동의 과도기적 순간이라고들 한다.[[1920년대]]는 달러와 파운드가 비슷한 위상을, [[1930년대]]는 미국으로 대세가 기울지만 [[대공황]] 때문에 잠시 조정기, [[영국]]과 [[미국]] 둘 다 다시 1931년,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미국 달러]]가 다소 우세한 상태로 지속,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미국 달러]]가 1.5배 이상 더 쓰이기 시작하다가 비교적 저평가 되어 있던 미국의 힘이 전세계에 보여지자 [[1940년대]]로 접어들며 환율이 요동치고 화폐 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1944년 [[브레튼 우즈]] 협정 시기 경에는 달러가 파운드보다 2배 정도 더 보유되고 거래됨을 알 수 있다. 일각의 주장처럼 달러는 1944년에 갑자기 부상한 기축통화가 아니다.][* [[1944년]]에서야 [[미국 달러]]가 [[파운드 스털링|파운드]]를 추월했다는 견해나 연구도 있는데, 이는 [[대영제국]]과 이후의 [[영연방]] 내의 거래를 포함한 계산량이여서 그렇다. 당시 [[인도]] 등 식민지들은 [[영국]]의 파운드 블록 등 블록경제로 인해 [[파운드 스털링|영국 파운드]]만 보유할 수 있었으며, 영국의 정책 하에 경제거래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즉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닌 국내용 화폐 거래를 포함한 수치다. 당시 [[대영제국]]은 하나의 국가였고, 모든 식민지들과 연방들은 영국이 하나의 주권을 가진 상태였다. 일반적인 외국 간 거래, 시장에서는 1920년대 되어서 [[파운드 스털링]]과 [[미국 달러]] 간의 위상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파운드 스털링]]은 제국과 영연방 외에서는 [[미국 달러]]보다 우세한 기축통화는 아니었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국내거래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경제|미국 경제]]는 급상승하면서 서유럽을 추월하였고, [[미국 달러]]의 강세가 돋보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등극하면서 국제 외교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였다. [[미국]]의 [[소프트파워]] 역시 크게 성장하여 이제는 [[미국]]이 아닌 [[서유럽]]이 [[미국/문화|미국 문화]]를 즐기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란의 20년대]]를 기점으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사라지는데, 당시 [[디즈니]], [[재즈]], [[헐리우드]][* [[헐리우드]]는 [[1930년대]]부터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시작의 발판은 1910~20년대였다.], [[뉴욕시]][* [[뉴욕시]]는 1920년대부터 [[파리(프랑스)|파리]], [[런던]] 등과 같이 세계 예술, 음악, 미술 분야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등 미국의 문화 산업이 발달하게 되고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산업, 과학기술 역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광란의 20년대]]를 거치며 미국 경제의 규모는 전세계에 영향을 줄 만큼 성장하였으며, 이는 [[세계 대공황]]으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미국이 유럽을 진작에 따라잡은 [[2차 산업 혁명|산업기술]]이나 산업생산력과는 달리, 첨단 과학 기술의 근간인 [[기초과학]]은 1920년대까지는 [[미국]]이 대표적인 [[서유럽]] 내 과학 강국 [[독일]], [[영국]]에 비해 열세였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의 경제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학술, 대학, 연구 수준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 중반 정도에는 [[독일]], [[영국]]과 동등하거나 조금 더 우세했다.[* 일례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24~1926년 [[영국]], [[독일]], 즉 [[서유럽]]으로 유학을 갔지만, 1936~1938년에는 [[앨런 튜링]]이 [[미국]]으로 유학올 정도로 역전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전체주의의 광기와 전운이 감도는 유럽을 피해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기초과학은 한층 진일보한다.이 무렵에서부터 세계 학술과 연구의 중심지로 [[미국]]이 [[서유럽]]을 제치기 시작한다. 군사력은 [[남북전쟁]] 이후로 [[미 육군]]은 강대국의 군사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동시대 [[유럽]]의 전쟁인 [[보불전쟁]], [[크림전쟁]]의 2배 이상의 규모였다. 게다가 미국은 서부개척시대부터 엄청난 총기 강국이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향화되었다. 사실 군대 내 급양, 공업화를 비교해보자면 [[미국]]이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강한 편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의 [[미국 해군]] 육성정책을 통해 [[미 해군]]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미국 해군]] 역시 [[영국 해군]]과 거의 동등한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때 [[영국]]은 재정난에 봉착했고, [[미국]] 내에서는 반전 및 군비 축소 여론이 높았다. 그리고 [[영국]]은 [[영일동맹]]을 파기해줌으로서 [[미국]]의 핵심 이익인 [[미국]]의 [[태평양]] 패권을 보장하였다. 그렇게 [[대서양]]은 [[영국]]과 [[미국]]이, [[인도양]]은 [[영국]]이, [[태평양]]은 [[미국]]이 패권을 잡으므로서 전세계 바다 패권을 [[미국]]과 [[영국]]이 양분하게 된다.] 당시 [[공군]]은 태동하는 시기였지만 전반적인 항공우주기술은 [[미국]] 위주로 발달하였다.[* 1926년 [[로버트 고다드]]의 로켓 기술이나 [[찰스 린드버그]]의 1927년 대서양 횡단은 인류 항공역사에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이렇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미국이 부상하고 영국이 흔들리는 원인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초반부터 전쟁에 개입해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반면,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참전했기에 영국보다 손실이 적었고 그 대신 전쟁 내내 [[협상국]] 측에 막대한 자금을 원조하면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은 [[서유럽]]에 있었고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회피할 수 없었지만, [[미국]]은 [[대서양]] 건너 [[북아메리카]]에 있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당초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건함 경쟁]]으로 인한 전 세계 바다와 [[서유럽]]의 주도권 패권 경쟁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군사력과 산업능력으로 바라볼 때 [[영국]]을 제외하곤 유럽 내 [[독일]] 국력의 절대우위에 대항할 적수가 없었으므로 [[영국]]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군수 산업을 도맡았던 미국 기업들 또한 1차 대전을 기점으로 거대하게 성장하였다. 이게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 아닌 미국의 군사 기술이 크게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innica)가 붕괴되었으며 [[영국]]의 힘과 위상이 [[초강대국]]에서[* 물론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였고, 규모면에서는 오히려 절정기를 구가하지만] 하나의 [[강대국]]으로 쇠퇴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이 [[미국]]에 재정적 목덜미가 잡혀 외교무대에서 끌려다닌 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영제국]]과 [[영국]]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인 해군우위 "Two power standard"를 외교무대에서 공식적으로 상실하고 [[미국]]과 대등한 조약을 맺는다고 선언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가장 상징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미국]]이 당대 최강대국이자 패권국인 [[영국]]에게 대등한 조건을 강요할 정도로 [[미국]]의 외교적 입지가 컸다는 의미이며, [[영국]]이 [[미국]]에 [[영일동맹]]을 파기하는 조건을 달아 타협을 요구할 정도로 오히려 아쉬운 쪽이 [[영국]]이였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사실 이 협정의 순간부터 영국의 범 세계적 해상패권이 무너졌기에 팍스 브리태니카는 늦어도 이 협정을 맺고 실질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대등한 해군을 건설한 1920년대 중반부터 종료된다. [[전간기]]의 [[영국]]은 19세기의 영국이나 2차대전 이후의 미국처럼 전 세계의 바다패권을 독차지한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플레이어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아시아태평양지역과 서반구에서의 영향력이 해군조약 이후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미국]]이 이미 그 지역에서 영국을 제치고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영국 내에선 '''"위신을 위한 해군(미국)과 생명 같은 해군(영국)이 어떻게 같을 수 있냐"며 한탄하는 목소리도 많았고, 저 조약에 오히려 [[대영제국]]이 타협을 구걸하는 듯이 비쳐지는 모습에 충격을 먹었다.''' 그렇게 부상하는 [[광란의 20년대|미국의 위상]]에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인들은 [[https://time.com/5453734/churchills-surprising-anti-americanism-and-what-changed-his-mind/|상당한 반미감정]]을 지녔고, 또한 [[미국]]의 국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도 지녔다. 그렇게 [[영국]] 주도의 일극 해상 패권과 금융/무역질서가 붕괴되고 여러 세력들이 균형을 이루는 세력균형의 장으로 변모하며 영국의 외교적 입지는 축소되었다.] [[미국]]의 부상과 국력역전의 트리거가 만들어지며, [[대공황]]을 통해 미국의 비중이 증명된다. 이후 [[1930년대]]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중미은협정|영국과 미국의 치열한 경쟁]]과 [[뉴딜 정책|몇년의 조정기를 거쳐]] [[1937년]]~[[1939년]] 경에 미국이 국력의 우위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들어가는 [[1940년대]]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대영제국]]을 1.5배~2배로 압도하기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미국이 고립주의를 깨고 본격적으로 국력투사를 시작한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더 이상 아무도 [[미국]]이 [[초강대국]]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열강 패권이 확실히 [[대영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2차대전에서 승전국 지위로 역시 동구권의 패권을 장악한 소련과 함께 냉전 체제가 성립되며, 대영제국이 해체된 이후 [[미국]]과 [[영국]]간의 특별한 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런 국력변화에 따른 세계정치의 판도 변화와 세계인들의 세계관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국]]과 [[영국]]의 "특별한 관계"와는 별개로, 20세기 전반, 특히 [[전간기]] 기간에 걸쳐 [[미국]]과 [[대영제국]]간의 긴장관계가 얼마나 팽팽하고 극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 [[2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불과 몇년 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WAR PLAN RED를 [[색부호 전쟁 계획|진지하게 주장하였고]] 이는 실제 미국의회의 예산승인까지 떨어졌었다!''' 그러다 2차대전의 기미가 보이자 취소되었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영국을 견제한 것은 그 시절까지도[* [[영국령 인도 제국]]이 독립하여 [[대영제국]]의 위상과 능력이 반토막되는 [[1947년]] 이전까지, 그 거대했던 [[대영제국]] 전체의 위상과 경제력, 군사력, 산업력, 문화적 영향력조차 모두 전방위적으로 압도해버린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1947년]] 인도 독립 이후에서야 [[영국]]을 웃돌기 시작하더니, [[수에즈 위기|1956년]]이후에서야 [[영국]]을 뛰어넘는 [[초강대국]]으로 확실히 세계에 각인되었다.] 가장 강력했던 국가는 단연 [[나치독일]]도 [[소련]]도 [[일본제국]]도 아닌 바로 "[[대영제국]]"이였기 때문. 사실 미국의 패권과 대영제국은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이였으므로 둘 중 하나는 양보하거나 사라져야만 했다. 결국 [[영국]]이 제국을 포기하고 [[미국]]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영제국]]이 [[나치독일]]과 [[일본제국]]과는 달리 명목상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든 주체는 바로 "[[미국]]"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거대했던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무너져버린 핵심적인 원인은 [[대영제국]]이 더 이상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미국과 영국의 관계로 돌아와서 정리하자면, [[19세기]]동안 적대관계를 이어왔고 [[1890년대]], [[1900년대]]의 [[영국]]과 [[미국]] 간의 '"[[https://en.wikipedia.org/wiki/The_Great_Rapprochement|위대한 화해]]"와 [[영국]]의 [[서반구]]에서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미영관계가 꼭 좋지만은 않았으며, 때때로 [[색부호 전쟁 계획|상당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2차 대전 이전 20세기 전반기에선 미국과 영국은 마치 [[G2]]와 같은 존재로서 서로간의 세력 견제가 이루어지던 시대였으며, 그 시절까지도 [[영국]]이 국제무대 속 권력의 중심이였음을 의미한다. 오늘날과 같은 "특별한 관계"는 [[1940년]]경, 더 이상은 [[미국]]과 [[영국]] 간의 벌어진 힘의 격차를 무시할 수 없었고, 눈앞의 [[나치 독일]]의 위협에 [[영국]]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공짜는 없다.결국 [[영국]]은 그로 인해 산업적,경제적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카리브해]]의 군항들과 [[캐나다]]의 군사기지, '''더 나아가 전 세계 [[대영제국]]의 해군기지들을 [[미국]]에 전부 이양하게 되는 대가'''를 미국에 지불하였고 이는 '''[[대영제국]]과 전후 [[영국]]의 세계패권이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된 결정적 사건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