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영관계 (문단 편집) == 갈등 == 다만 현실에서 미국과 영국이 마냥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외교인데 영국은 2차대전 이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일개 강대국으로 주저앉고 몰락해버린 반면,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였고 현재는 소련의 몰락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인 만큼 양국이 서로 동등할 리가 없다. 실제로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영국을 깔보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번번히 있었다. 현재의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는 영국이 국제 정세에서 스스로의 독자 노선을 거의 포기하고 미국의 국제 전략에 대해 지지를 선언하며 동참한 것이 매우 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핵무기 개발과 [[수에즈 전쟁]]이다. 첫째는 [[영국의 핵개발]] 항목 참조. 당시 미국이 영국에 핵개발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정작 1946년 [[미국 의회]]에서 원자력법[* 발의자인 브라이언 맥마흔 상원의원 이름을 따 맥마흔법으로도 불린다.]을 통과, 핵무기 기술을 타국에 넘길 수 없다고 의결해서 취소시켰다. 이에 발끈한 [[영국]]이 [[호주]]와 손을 잡고[* [[호주]]가 핵실험 부지와 핵무기 원료 물질을 제공하였다.]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미국이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1958년 원자력법 개정으로 대영 핵외교 노선을 수정한 미국은 영국과 핵무기 협약을 맺어 공동 핵무기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국은 미국에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프랑스에게 행한다. 물론 미국과 영국의 무시에 분노한 프랑스도 좌우 성향을 막론하고 핵무장을 지지하여 핵개발에 성공하였다. 또한 수에즈 전쟁 당시,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무리하게 중동에서 미국에 통보나 상의도 없이 이집트와의 전쟁을 일으키자[* 소련의 눈치를 봤다는 학설도 있으나, 존 루이스 게디스 교수의 저서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소련과의 관계보다 영국이 미국과 상의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미국이 반발하여 영국에 압력을 행사해 전쟁을 강제로 종결시킨 일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영국의 유럽 공동체 가입이 가속화되고[* 1973년 1월 1월 유럽경제공동체 (EEC) 가입] 친유럽 성향의 에드워드 히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시 미영관계가 소원해졌다. 히스는 영국 역사상 가장 친유럽 성향 총리로 평가받으며 영국의 미래는 유럽과의 협력에 달렸다고 판단, 영국이 2차대전 이래로 유지해 온 유독 미국과 영연방과의 관계에 치중하는 외교를 탐탁치 않아 했다.[* 히스의 미영관계에 대한 인식은 그가 1973년 전 미국 외교 안보 보좌관이었던 월트 로스타우(Walt Rostow)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서한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25년간 영국은 주로 미국에게 잘 보이고자 여러 제국 영토에서 철수, 독립국들을 모아 [[영연방]]을 구성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국 국익 증진은 미미하였고, 손실은 일정 수준 이상이었습니다. (For the last 25 years Britain had been divesting itself, largely to the please the Americans, of imperial responsibilities and creating a Commonwealth of independent countries. The result was of little benefit and of some liability to the United Kingdom.)] 그는 영국이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주요 유럽 국가들의 경계와 불신을 산다고 믿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같은 서방 진영임에도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과 유럽공동체(EEC)간에는 갈등 요소들이 존재했다. EEC는 공격적인 농업 보조금, 보호무역 정책을 유럽 단위로 실행하고 있었고 대유럽 무역 적자가 늘어나던 미국에게 이는 눈엣가시였으며, 유럽 입장에서는 1971년 [[닉슨 쇼크]]로 금본위제와 브레튼우즈 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자 충격의 한방을 먹었다는 인식이 있었다. 또 닉슨 행정부가 미국 내 고립주의 여론을 어르기 위해 미군의 유럽 주둔 비용을 더욱 공평히 분담하자고 유럽 측에 제의했으나 영&프는 어차피 자국 이익 수호를 위해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 붙잡자고 경제적 양보는 할 수 없다고 하나같이 쌩깠다. 프랑스는 아예 60년대 [[샤를 드골]] 정권 때부터 영국을 통한 [[트로이 목마|미국 이권의 유럽 공동체 잠식]]을 우려하여 두 번이나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신청에 퇴짜를 놓은 전적이 있다. --프랑스가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는 미영관계에 버금가는 영-유럽 관계를 쌓고자 하였고, 이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서방 경제·안보 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당시 외교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충돌을 빚는다. 양국 관계는 1973년 4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유럽의 해'(Year of Europe)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면서 더욱 험난해졌는데, 유럽의 해란 즉슨 신 [[대서양 헌장]] 발표를 통해 미영간의 특별한 관계를 미국과 하나의 유럽[* 경제공동체를 넘어선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유럽] 사이의 특별한 관계로 업그레이드해 서방 민주주의 동맹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유럽의 해' 구상과 발표는 유럽 국가들과의 상의도 없이 키신저의 독단으로 진행됐고, 그렇게 나온 개념도 모호하기 짝이 없어 막상 발표되고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에게 [[뜬금포]] 취급을 받았다.[* 히스 총리는 '헨리 키신저가 대상 국가들과의 상의도 없이 유럽의 해를 공포한 일은 내가 [[트라팔가 광장]]의 사자상 사이에 서서 '미국 구원의 해'를 선언하는 격이었다'라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For Henry Kissinger to announce a Year of Europe without consulting any of us was rather like my standing between the lions in Trafalgar Square and announcing that we were embarking on a year to save America.)] 또한, '유럽의 해'의 의도는 뭔가 그럴싸하지만 당시 영국, 프랑스 정부[* 당시는 미 패권주의와 미-소 양극단적 국제질서 형성을 극도로 경계한 샤를 드골 대통령이 사임한 지 불과 4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고, 그의 독자외교 노선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외교정책의 기본 기조로 자리하고 있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이를 유럽의 독자적 외교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냉전 구상에 종속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받아들였다. 시대적 배경을 덧붙이자면, 당시 MBFR[* Mutual and Balanced Force Reductions, 상호균형군축],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논의 등으로 미국과 소련의 양자 [[데탕트]]가 진행되자, 유럽 내에서는 초강대국끼리 [[그들만의 리그|담합]]하는 과정에서 유럽 안보 보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게다가 1973년 6월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사이좋게 핵전쟁 방지를 위한 합의[* Agreement on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를 통해 핵무기 사용 최소화를 선언하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내 핵전쟁 발발시 미국 [[핵우산]]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응해 스스로 살 길을 찾고자 한 [[조르주 퐁피두]] 정부는 드골 때부터 이어져 온 독자적인 소련 및 동구권과의 데탕트에 몰두했다. [[서독]] 또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위시하여 나름대로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 나갔다. 미국 입장에서는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는데-- 서방 국가들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유럽의 해는 이렇게 따로 노는 유럽 각국의 외교를 미 외교정책과 더욱 일관되게 하여 동맹을 강화하자는 키신저의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무튼 키신저는 '유럽의 해' 연설을 통해 유럽 안보 문제에 상술된 무역적자, 미군 주둔 비용 문제까지 얹어 미-유럽 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논의를 각각의 유럽 국가와의 1:1 협의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즉 안보를 지키고 싶으면 보호무역도 손보고, 분담금도 더 내라는 것. 또, 유럽 공동체 차원에서 논의할 것 없이 개별 국가가 미국의 큰그림에 종속될 것을 [[답정너|약속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추구했던 영국은 미국에 즉답을 하기 전에 유럽 국가들의 의견 조율을 통해 미국에 대한 유럽 공동체의 통일된 입장을 도출하고자 하였고, 수개월간 지지부진한 논의만이 이어진다. 특히 프랑스가 정치적 유럽 공동체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독자외교노선과 유럽 내 지위 보장을 최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유럽 통합과 미국과의 혈맹 유지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던 영국의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얻지 못했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시간을 끌었고 이는 키신저의 신경을 자극한다. 키신저 입장에서는 '유럽의 해'는 서방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다짐하는 상징적 선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의도는 좋았다|유럽 좋자고 시작한 이 간단한 일]]을 왜 못하냐고 답답해했지만, 그는 유럽 내에서도 이해관계가 갈리며, 동맹국들이 순순히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했다. 유럽의 해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자 키신저는 7월 방미중이었던 영국 내각장관 버크 트렌드 '''경'''[* Sir Burke Trend, Cabinet Secretary, 장관급이지만 여당 하원의원이 장관에 임명되는 타 부서와 달리 관료 출신 공무원이 맡는다. 버크 트렌드 경은 1974년 트렌드 남작(Baron Trend)에 임명된다.]을 친히 불러 매우 분노하기까지 했다.[* '영국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가 적국을 대하는 태도 같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유럽은 고통스러운 결과(유럽 주둔 미군 감축)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국 외무부 내에서도 키신저의 독단성이 마치 동맹이 아닌 적국을 대하는 태도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키신저와 닉슨은 미국을 만만하게 보는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후 ‘유럽의 해’는 키신저에게나 영국에게나 흑역사로 남았다. 또한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미영관계는 더더욱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은 자연스레 [[이스라엘]]을 지원했지만 아랍 산유국의 눈치를 더 봐야 했던 영국은 이에 협조하기를 공개적으로 거부, 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전쟁 발발 즉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을 전면 금지하여 당시 항구에서 이스라엘행 배에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무기마저 동결.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이런 조치를 당한 주영이스라엘대사는 그 무기만이라도 가던 길 가게 해 주면 안 되냐고 빌었지만 이런 상황을 수년 전부터 상정해 중립 노선을 굳게 결심한 영국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영국 정부는 중립을 매우 중요시해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작전[* 니켈 그라스 작전, Operation Nickel Grass]이 먼 거리와 중간기착지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미군 수송기가 자국 공군기지는 물론 영공상에 한 발짝도 못 들게 하였다. 아랍 국가들에게는 우리 절대 이스라엘 편든 적 없으니 석유수출 금지만은 제발 말아달라는 절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이랑 사이좋게 원유감산&유가인상 크리를 먹었다.--] 상황 종료 이후 미국, 특히 키신저--또 이양반--는 영국의 처신을 괘씸히 여겨 영국에 대한 온갖 외교적, 경제적, 정치적 보복을 구상했는데, 이쯤이면 이전의 혈맹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9-76ve15p2/d226|#]][* 영국이 자국 항공산업의 명운을 걸고 프랑스와 공동개발한 [[아에로스파시알-BAC 콩코드|콩코드]] 여객기를 미국에서 금지해 해당 기체가 빛도 보지 못한 채 실제보다 30년이나 일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핵협력 완전 중단--손절--, 스페인의 [[지브롤터]] 영유권 지지, [[북아일랜드]] 독립운동 지원(!!!) 등 이보다 더한 보복이 수두룩하다.] 이렇듯 유럽 공동체 문제와 중동 문제로 1973년은 미영관계에서 유난히 험난했던 한 해로 손꼽힌다. 현재 시점에서 두 나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혈맹 관계이다. 미국이 독립 후 100여년 간의 어마어마한 발전으로 영국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점점 갖추게 된 상태에서 조금씩 교류를 늘려 나갔고 두 번의 세계 대전, 특히 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을 제외한 사실상의 서유럽을 다 먹어버렸던 강적 나치 독일에 맞서 같이 싸운 경험은 두 나라를 혈맹으로 만들었다. 승전 후에도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보다 미국이 군사나 경제 등 여러 부분에서 엄청난 우위에 서게 되자 영국은 미국을 눈치를 봐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 후에는 [[나토]]의 일원으로 소련에 맞서 같은 입장에서 처리하도록 노력해야 했고,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며 유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영국이 미국에게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미국의 우위를 인정한 것이 현재 원만한 미영관계를 구축한 발판이라는 것이다. 이때문에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명백한 힘의 격차로 이해 영국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 미국을 비난하거나 디스할 때 미국인들이 이에 대한 반발로 흔히 나오는 말이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너희(영국)를 구원한 존재(미국)가 누군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분개한 영국인들은 미국이 히틀러로부터 영국을 구한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였음을 거론한다." 실제로 영국은 2차 대전 전후 과정에서 해외의 여러 해군 기지나 항구 등을 미국에게 넘겨 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이 총리가 되는 것을 지지하자 영국 정부에서는 반발하는 기류가 생겼다. 외국의 국가원수가 자국의 선거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11&aid=0003563827|#]] 주미 영국대사쪽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에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폄하한다는 외무부 보고서가 공개되자 곤혹을 치뤘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0937246|#]] 결국 주미 영국대사는 사임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421&aid=0004086599|#]] 2020년 2월 7일에 영국 외무부는 주미 대사에 캐런 피어스 유엔 대표부 대사를 임명했다고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2&oid=001&aid=0011386511|#]] 2020년 1월에 보리스 총리가 미국의 반대에도 화웨이 장비를 쓰겠다고 밝히자 미국에서는 실망이라며 유감을 표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971102|#]] 또한 영국 국방장관은 미국 없이 전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3263955|#]] 미국 공화당의 일부 상원의원들은 영국이 5G 구축 사업에 [[화웨이]]를 참여시킨다는 이유로 최신예 전투기의 영국 배치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1593672|#]] 영국이 유럽연합을 완전히 떠나면서 2021년부터는 미영관계가 예전같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210338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