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영전쟁 (문단 편집) == 전쟁 배경 == [[미국]]은 [[미국 독립 전쟁|독립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립했으나 이것은 [[프랑스]] 등 지원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국력]]으로는 여전히 유럽 [[국가]]에 밀리는 신생국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독립 당시 미합중국의 [[인구]]는 250-300만 수준[* 참고로 동시기 [[조선]]은 1,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이었고, 영토도 초기엔 대서양쪽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지금의 미국보다 훨씬 좁았다. 이러니 인구 천만 단위에 식민지까지 운영하는 영국이 전력을 다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편 [[영국]]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한숨 제대로 돌릴 틈도 없이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돌입했다. [[1807년]] 경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 대부분을 점령하고 대동맹국들 중 유일하게 저항하던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발효했다. 영국은 그 대응으로 우월한 [[해군력]]을 활용하여 프랑스 연안 곳곳을 [[해상 봉쇄]]하는데 이는 혁명전쟁 초기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실시했던 초장기간 해상차단 작전의 연속이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의 모든 [[항구도시]] 외곽 [[바다]]에서 무수한 전열함으로 봉쇄선을 치고 초계활동을 벌였다. 이건 [[군함]]의 숫자가 많고 숙련된 선원과 해군장교가 풍부했던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영국은 프랑스의 원양 [[무역]]을 차단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동맹국들에 자금지원과 [[병력]]을 [[파견]]하는 등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대프랑스 전략의 일환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한 강제검열을 개시했다. 그런데 단순히 [[검열]]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와 교역을 하는 상선에 영국에서 [[세금]]을 높이 때렸다. 세금 납부나 검열을 거부하면 [[깡패]] 같은 해군력으로 가차없이 발포해 나포했다. 여기에는 미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전 [[국민]]이 영어를 썼던 터라 영국 [[탈영병]]들이 가장 숨기 좋은 곳이었다.[* 사실 영국 입장에서 탈영병일 뿐 이쪽 입장에선 미국으로 진작에 귀화한 사실상 미국인인 경우도 꽤 있었다(이중엔 아일랜드계도 많았다).] 더욱이 이때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4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던 터라 아직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국 [[상선]]은 더욱 집중적인 수색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독립한 지 40년도 안 된 터라 영국에게 쌓인 원한도 풍화되기 전... 그래서 미국에서도 점점 불만이 고조되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미국 [[선원]]의 수준이 좋은 편에다 같은 [[영어]]를 썼기 때문에 때론 멀쩡한 '''[[미국인]]들조차 강제로 [[영국 해군]]에 징집당하는''' 황당한 경우도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영국인]]이었다가 미국인으로 귀화한 [[영국계 미국인]]은 물론이고([[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들 역시 미국인이라며 항의했다) 당시 돌던 위조 [[신분증]] 때문에 진짜 미국에서 평생 자란 멀쩡한 미국인조차 영국군에 징집되는 황당한 상황까지 자주 발생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는 다시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영국의 강제 징집은 [[프레스 갱]](press gang)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았다. 우선 영국에서는 아무나 보이면 잡아다 해군으로 만들었는데 시의원이 잡혀가거나 프레스 갱에 의해 끌려갔다가 [[한군두|막 제대한 인원을 다시 끌고 가는 등]] 폐해가 심각했다. [[혼블로워]]에서도 밤중에 [[호각]]을 [[신호]]로 길거리에 나와있는 모든 [[남성]]을 무차별로 징집해가는 당시의 막나가는 [[상황]]이 잘 묘사된다. [[항구]]와 해안 [[도시]]에서 점점 인원을 채우기 어려워지자 내륙까지 징발원들이 돌며 징집했고 이에 [[마을]] [[단위]]로 징발원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영국 [[본토]]에서는 징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눈을 돌린 게 미국 상선에 탄 미국 선원이었다(자국민도 납치하는데 [[외국인]]을 봐줄리가 없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법률]] 중 영국의 [[시민]]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있는데 미국은 너무나도 신생 국가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끌고 갔다고 억지로 변호하기는 하지만 이는 영국이 내세우는 영국 시민이라는 기준이 한 번 영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영국인이라는 [[궤변]]이었기 때문에 이 논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의 상당수는 여전히 영국 시민이었고 따라서 영국은 미국 시민을 마구잡이로 징병해도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농담이 아닌 게 영국은 같은 논리로 영국군의 이동 [[정보]]를 전달한 한 영국 태생의 미국 시민을 자국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반역죄]]'로 기소했다가 미국이 반발하여 포기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미국 북쪽에 위치한 [[영국령 캐나다|영국령 북아메리카]](British North America; BNA, 현재의 [[캐나다]]) 식민지는 전략적으로 미국에게 위험요소였다. 영국령 북아메리카는 [[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했기 때문에 [[테쿰세의 저주]]로 유명한 [[테쿰세]]가 티피카누 전투를 일으키는 등 영토확장에 매우 위험한 존재로 떠올랐다. 미국은 세력확장을 막 시작하고 있었기에 영국령 북아메리카까지 탐냈고 이런 조건이 갖춰지자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에 전쟁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양국은 정작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영국은 대부분의 전력을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에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신경쓰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작 선전포고를 한 미국도 영국과 친하고 교류도 많이 하는 연방주의자들의 근거지인 [[북부]]가 전쟁에 반대했고, [[민병대]]는 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였다. 이 시기는 아직 미국 [[연방정부]]가 힘이 매우 약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형성되기 전이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나라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이보다 50년쯤 뒤 [[남북전쟁]]을 겪고 이겨낸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시기부터로, 이전에는 [[미국/주|주]]의 독립성이 현재보다 훨씬 강했다.] 이런 미지근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국경]] 근처 [[민간인]]들은 서로 [[이웃사촌]]이라는 [[생각]]이 강하여[* 애초에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미국 13주 출신들도 많았는데 [[왕당파]]여서 피난 온 사람뿐만 아니라 그냥 [[땅]] 얻으러 간 [[사람]]도 많았다. 본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도 [[퀘벡]] 지역보단 [[뉴잉글랜드]](지금의 [[뉴욕]]과 [[매사추세츠]])와 더 가까워서 국경이 없는 듯한 교류가 활발했다. 국경을 넘어 친지들 놀러가는 일은 일상이었고, 아이들을 국경 너머에 있는 [[학교]]에 보낼 정도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곳 민간인들은 "우리 잘 지내는데 왜 그래"라고 반응할 정도였다. [[나이아가라]] 근처 양군 [[지휘관]]들은 전쟁 직전까지 심심할 때 만나 [[술]] 마시고 [[카드 게임]]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선언하고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육군]]이 고작 7천명에 [[군함]]도 14척 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영국과 [[인디언]]에 대한 전쟁을 선동했던 정치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전쟁을 선동하면서 정작 [[상비군]] 확대나 전쟁 노력을 결집시킬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철저히 반대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전쟁 준비가 아닌 전쟁 [[선동]] 정치가들의 궤변과 허풍을 기반으로 시작된 영국령 북아메리카 침공은 그야말로 대참사로 끝나게 된다. 한편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 영국은 아직 미국의 선전포고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 [[선박]]에 대한 강제적인 수색 [[명령]]의 수위를 낮추며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주영 미국 [[대사관]]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중요성을 못 느껴 본국에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과 영국은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