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영익 (문단 편집) === 잘 나가는 젊은 세도가 === 1860년([[철종(조선)|철종]] 11) 아버지 [[민태호(조선)|민태호]]와 어머니 [[파평 윤씨]] 윤직의(尹稷儀)의 딸[* [[중종(조선)|중종]]의 장인인 윤여필의 직계 후손이며 민태호의 첫 번째 아내로 민영익을 낳고 1866년 사망했다. 이후 민태호는 진천 송씨(송재화의 딸)와 재혼했는데 이 사람이 [[순명효황후]]의 생모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민영익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발해 몰락하던 [[여흥 민씨]] 삼방파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는데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다. 그러다가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같은 민씨 [[가문]] 출신인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자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으며 명성황후가 [[권력]]을 쥐면서 일가 [[친척]]이라는 것에 힘입어 아버지 민태호도 1870년 [[벼슬]]길에 올랐다. 민영익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1874년 명성황후의 양오빠였던 [[민승호 암살 사건]]이었다. 명성황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외삼촌이었던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민승호마저 친아들을 두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을 죽은 양오빠 민승호[* 민영익에게는 13촌 아저씨뻘이 된다.]의 대를 이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이고자 했다. 아버지 민태호는 당시 민영익이 외아들이라서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명성황후의 뜻이 강경하고 형제들마저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조카가 되면 집안 사람 모두가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강권해서 결국 일이 성사됐다. 이 때부터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고종의 외사촌 동생이 되어 순식간에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다른 자료들에서는 이 때 민영익을 양자로 보내 정작 자신의 후사가 없게 된 민태호가 [[민영환]]을 [[입양]]했다고 잘못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민태호가 [[동명이인]]이다. 민영환의 양아버지 민태호(閔泰鎬)는 [[민승호]], [[민겸호]], [[여흥부대부인]]과 친형제로서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3남 [[민진영]]의 5대손이다. 순명효황후와 민영익의 친아버지 민태호(閔台鎬)는 민유중의 차남 [[민진원]]의 5대손이며 후사는 먼 친척 입암공파 민술호(민사용의 6남 민여검의 9대손이다.)의 아들 [[민영린]]이 입양되어 있었다. 둘은 12촌 형제인 동명이인으로 관계를 헷갈리면 가계도가 개판이 되어 버린다.] 1877년(고종 1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77_013965|#]] 문과 급제 후에는 벼슬에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처음으로 받은 [[관직]]이 홍문관 전한으로 벌써부터 종3품의 벼슬이었고 1878년 좌승지가 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를 겸하고 곧바로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78년에 받았던 직책 모두 정3품의 당상관 직책인데 그의 나이가 불과 2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출세가도다. 1880년 이조참판이 되어 종2품으로 올랐으며 1881년 협판통리아문사무에 오른다. 그야말로 젊은 세도가가 따로 없었으며 주변에 개화파를 끌어모았는데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이중칠(李重七), [[조동희(1856)|조동희]](趙同熙), 김흥균(金興均)[* [[철인왕후]]의 조카. [[갑신정변]] 이후 항렬자를 바꾸면서 김흥'''규'''(金興'''圭''')로 개명했다.], 홍순형(洪淳馨)[* [[효정왕후]]의 조카], 심상훈(沈相薰)[* 대원군의 조카. 부대부인 민씨가 이모가 된다.], [[어윤중]](魚允中) 등이 민영익의 사저였던 죽동궁[* [[명온공주]]와 [[김현근]]이 살던 곳이다.]에서 자주 회합하면서 이 사람들을 '죽동 8학사'라 불렸고 개화 정책을 선도하는 젊은 정치인들로 자리 잡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숙부 민겸호가 [[사망]]하고 민영익의 집도 공격당했으나 살아남았고 이후 사죄 사절로 [[박영효]]와 일본에 다녀와서 3개월간 머물렀으며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톈진시|톈진]]에 머무르면서 해관 사무를 교섭했다.[* 이해에 친여동생이 왕세자빈이 되면서 더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