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영익 (문단 편집) ===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말년 === 갑신정변 후 민영익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일단 그렇게 자주 나오던 그의 이름이 1884년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이는 그가 이후 행동했던 정치적 입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갑신정변 직후 [[흥선 대원군]]의 귀국과 관련한 문제를 가지고 톈진으로 가서 [[이홍장]]과 환담 하였고 이후에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며 홍삼 전매사업으로 마련했던 고종의 비자금을 홍콩 프랑스 은행에 예치시킨다. 그리고 귀국하여 우영사와 상리국 총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된다. 하지만 1886년 조정 일각에서 펼쳐지던 친러정책에 반발하여 조선에 머물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 거기서 고종 폐위 계획을 듣게 되면서 다시금 이 사실을 조선 조정에 알리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것으로 인해 결국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고 이게 그가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결국 1886년 8월 그는 홍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물론 고종은 그를 여전히 신임하여 그는 고종의 비자금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귀국하여 1889년에는 판의금부사와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반청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청에서 파견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반청운동은 당연히 청나라의 미움을 사게 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곧바로 명예직을 전전하다가 1891년 판돈녕부사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때 홍콩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었던 때였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지속적으로 머문다. 그러다가 1895년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국내에서 그의 정치적 기반은 사라지게 된다. 물론 1897년에 특명전권공사로 1899년에는 표훈원 총재를 제수받는 등 여전히 고종에게서 신임을 받았으나 사실상 그가 정계 복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되면서 이는 쓸모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고종도 종국에는 그에 대한 신임을 저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는 귀국에 대한 생각을 버리게 되고 상하이로 영구 망명하게 된다. 이후 1914년에 망명지인 상하이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그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로 갈리는 편이다. 그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비자금을 활용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한편 그냥 고종의 비자금을 유용하며 유유자적하게 외국에서 생활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기록이 사실이던간에 젊은 세도가이자 개화기의 한복판에서 보낸 그의 화려한 20대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쓸쓸한 말년임에는 틀림 없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