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빌로니아 (문단 편집) === 신바빌로니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바빌로니아)] 칼데아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기원전 620년 바빌론에서 궐기하자 안 그래도 신아시리아의 폭정에 지긋지긋해하던 바빌론인들은 바로 나보폴라사르의 편을 들었다. 어찌나 신아시리아에게서 민심이 떠나갔는지 그 넓은 바빌로니아 땅에서 아시리아에게 충성을 유지한 건 도시 니푸르와 아시리아와 가까운 북부 지방 일부뿐이었다. 하지만 나보폴라사르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시리아가 곳곳에서 터지는 반란으로 정신이 없다고는 하나 몇백 년 동안 쌓아온 군사력은 여전히 굳건했고,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과 인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만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나보폴라사르에게 유리했다. 신샤리쉬쿤 왕이 여러 차례 바빌론 원정을 떠나려 시도했지만 수도 [[니네베]]에서 연속적으로 반란이 터지는 등 워낙에 입지가 불안했기 때문. 나보폴라사르와 신샤리쉬쿤 왕의 백중세는 [[메디아]]의 왕이자 아시리아의 또다른 봉신이었던 키악세레스가 반란을 일으켜 나보폴라사르와 동맹을 맺으며 끝났다. 키악세레스가 수많은 [[이란인]]들을 이끌고 나보폴라사르의 편에 가담하자 저울의 균형추는 바로 나보폴라사르 쪽으로 넘어왔다. 특히 키악세레스는 그동안 아시리아 제국이 초토화시켜 버려서 기존 지배층이 싹 갈려나간 [[엘람]] 지방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해 꽤나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 북쪽 [[코카서스]] 지방의 [[스키타이|스키타이인]], [[흑해]] 인근의 민족들도 하나같이 공통의 적 아시리아를 쫓아내기 위해서 동맹군에 가담했다. 아시리아가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내부 반란을 통제하면서 이들까지 한꺼번에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all_of_nineveh.jpg|width=100%]]}}} || || '''{{{#E4C77E 신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E4C77E 니네베}}}]]의 함락.[* 니네베의 함락으로 신아시리아 제국은 멸망한다.]}}}''' || 기원전 615년경, 신샤리쉬쿤 왕은 내부의 반란과 바빌론 군대와 맞서 싸우는 데에도 벅찬 상태였다. 이를 노린 키악세레스가 이란 군대를 이끌고 아시리아의 본진으로 진격했고, [[님루드]]와 아라크파 등 아시리아의 대표 대도시들을 [[빈집털이]]했다. 한번 본진이 털려나가자 큰 금이 쩍 가버린 아시리아는 이때부터 그냥 속절없이 무너진다. 1년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 흐른 기원전 614년에는 종교 중심지이자 최대 성지 [[아수르]], 두르-샤루킨, 임구르-엔릴, 가수르, 카네쉬 등 대도시들을 모조리 잃었다. 신샤리쉬쿤은 제국의 마지막 여력을 모아 최후의 발악을 시도, 한번 바빌로니아-메디아 동맹군을 밀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동맹군이 1년 만에 전열을 재정비해서 아시리아에 총공세를 퍼붓자 결국 무너졌다. 기원전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가 끝내 함락당했고, 이때 신샤리쉬쿤 왕이 전사하며 결국 5년간의 전쟁 끝에 신아시리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무너진 니네베에서 왕족이자 장군이었던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쳐 잔존 세력을 규합하려 시도했다. 동맹군은 아슈르우발리트 2세에게 속국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화의를 제안했지만,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거부했다. 결국 기원전 607년경에 아슈르우발리트 2세의 부흥 운동마저 동맹군에게 짓밟히며 아시리아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나보폴라사르가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제국을 재창건하며 '''[[함무라비]] 이래 1,000년 만에 메소포타미아계 제국의 중심이 [[바빌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은 605년에 그대로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신바빌로니아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하며 신바빌로니아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잔재들을 철저하게 지우는 데 공을 들였다.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끝장내는 한편,[* 참고로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북부에서 동맹군에게 패한 이후의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하란]] 등 북부 대도시들을 회복하려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시리아 북부의 잔군들을 처리했으며 [[고대 이집트|이집트]]와도 전쟁을 벌여 이집트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저 멀리 이집트가 굳이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관여했던 이유는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시리아의 봉신이었던 네카우 2세였기 때문. 네카우 2세는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들어선 신바빌로니아가 이집트에 관여할까봐 두려워했기에 아시리아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이집트는 기원전 605년까지 끈질기게 신바빌로니아 군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카르카므쉬]] 지방에서 신바빌로니아 군대에게 대패하며 결국 이집트로 물러난다. 한때 동맹이었지만 아시리아 멸망 이후 잠재 적국이 되어버린 스키타이와 흑해인들을 도로 북부로 몰아내기도 했다. 네카우 2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미련을 놓지 못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신바빌로니아에게 패배하고 이집트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집트를 침공해 속국으로 삼고 싶어했고 실제로도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지만, [[유대 왕국]]과 옛 [[이스라엘 왕국]]의 [[유대인]], 그리고 [[가나안]] 민족들과 [[페니키아인]]들이 하나같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앞길을 막아섰기에 이집트까지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중간에 걸리적거리던 유대 왕국은 철저하게 짓밟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때 일어난 사건이 그 유명한 '''[[바빌론 유수]]'''다. 당시로서는 촌구석에 해당하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와 [[에테멘앙키]]와 거대한 지구라트들을 보고 경악해 [[바벨탑]]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ZFzQRSXoAEkG6z.jpg|width=100%]]}}} || || '''{{{#E4C77E 최전성기의 [[바빌론|{{{#E4C77E 바빌론}}}]].[* 푸른색의 문은 [[이슈타르의 문]]이고 높이 솟은 사원은 [[마르두크]] 신전 [[에테멘앙키]]다.] }}}'''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은 정복 사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현 이란 지방의 [[메디아]]와 결혼 동맹을 맺어 메디아 공주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이후 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아미티스 왕비를 위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지어 위엄을 과시했으며, [[에테멘앙키]], [[이슈타르의 문]], [[행진의 거리]] 등 도시 바빌론 전체를 전면 개보수했다. 수도인 바빌론에 가장 큰 신경을 많이 쏟았지만 바빌론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왕국 내의 대다수 도시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재위기에 최소한 13개에 달하는 도시들이 완전한 리모델링을 걸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축과 문화, 영토 확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당대의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즉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었다. [[명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43년에 달하는 기나긴 치세가 끝나자 신바빌로니아는 조금씩 몰락했다. 아멜-마르두크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겨우 2년밖에 통치하지 못했고 그 후계자 네리글리사르 역시 [[페니키아]]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나 싶었지만 5년 만에 죽었다. 네리글리사르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 라바시-마르두크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 역시 즉위하자마자 암살당해 죽었다. 라바시-마르두크 이후 왕위를 이은 사람은 비칼데아인 계통의 장군 '나보니두스'였다. 장기 집권에 성공한 나보니두스가 즉위하면서 왕이 짧은 텀마다 갈아치워지는 일은 사라졌지만, 신바빌로니아는 멸망의 길로 급행 열차를 타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나보니두스는 [[아시리아]] 여사제의 아들로 태어났고 칼데아인 출신도 아니었다. 당연히 신바빌로니아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현지인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는 바빌론 한가운데 있는 [[마르두크]] 신전에 온갖 잡다한 신들을 함께 집중시키기 시작했고, 당연히 신바빌로니아인과 [[사제]] 계급은 자기들이 모욕당했다고 느꼈다. 이렇게 신관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차라리 군대의 마음이라도 얻어야 할 텐데 군부 역시 나보니두스의 호화로운 생활과 [[고고학]]적 취향 때문에 그를 경멸했다.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에서 멀리 떨어져 여행하면서 아시리아의 도시 [[하란]]에 신전을 재건하고 옛 유적을 파헤치면서 언제 이 유적이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는 등 쓸데없는 일에 시간이 허비했다. 당연히 바빌론인들은 자신들보다 아시리아를 더 중시하는 듯한 모습의 나보니두스를 경멸했고 점차 반란의 기미가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니두스는 국방을 아들 [[벨사자르]]에게 맡기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벨사자르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유능한 외교관이나 정치가는 아니었다. 벨사자르는 정치 [[엘리트]]층을 국정에서 소외시켰고 엘리트 계급의 불만은 더더욱 커졌다. 한편 이 시점에 동쪽에선 위대한 영웅이 탄생하고 있었으니 바로 [[키루스 2세]]였다. [[페르시아]]의 왕으로 태어난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49년에 기존의 패권국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3년 만에 전 페르시아인들의 황제로 등극하며 이란 지방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키루스 2세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침공했다. 그해 6월 오피스 전투에서 신바빌로니아 군대가 페르시아에 대패했다. 인근 대도시 시파르가 바로 페르시아에 항복을 선언하자 겁에 질린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으로 도주했다. 페르시아의 장군 고비아스가 그를 뒤쫓아 바빌론으로 추격했고, 결국 시파르가 항복한 지 '''2일''' 만에 페르시아 군대는 바빌론에 평화적으로 입성했다. 나보니두스 따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생각이 없던 바빌론인들이 그냥 문을 열어주었던 것. 나보니두스는 고비아스 앞으로 끌려갔고 키루스 2세가 도착할 동안 고비아스가 바빌론을 다스렸다. 고비아스가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되고 며칠 후, 신바빌로니아 잔군을 이끌던 벨사자르마저도 전사하며[* 여담이지만 관용 정책을 중시하던 키루스 2세는 벨사자르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줬다. 바빌론에서 6일이나 장례를 치러줬고 심지어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장례식에 참석하기까지 했다고.] 신바빌로니아는 완벽히 멸망했다. 그해 10월에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2세]]는 입성하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을 풀어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관용을 모토로 삼았던 키루스 2세답게 바빌론을 약탈하는 행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왕을 자칭하면서 [[마르두크]]의 대리인을 자처하기까지 했다. 특히 나보니두스가 마르두크 사원에 이방 신들을 모시는 등 욕먹을 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에 키루스 2세는 자신의 공격이 곧 마르두크의 복수라고 포장할 수도 있었다.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하자 [[아케메네스 왕조]]가 몇백 년 동안 바빌론을 다스렸고, 이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각주] [[분류:바빌로니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