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울로 (문단 편집) === 신화론 === 신화론의 주장은, 성경에서, 바울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심은 전체에 걸쳐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두는데 바울로는 역사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스스로 분명히 밝힌다. 그는 쓰기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제1 장 제12 절 (공동번역성서)] 바울로는 예수를 '''역사상 어떤 시대나 장소와 전혀 관련하게 하지 않는다.''' 디모데서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카 제1서 제2장에서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이다. 바울로는 나자렛을 상대로 삼아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 나자렛 예수라는 말조차 쓰지 않는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아폴로에게 예수를 전도할 때 아폴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는 언급 외에는 접점이 없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한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 사람의 비유, 바리사이인들과의 논쟁, 로마 제국 관헌과의 충돌도 바울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로가 예수를 신화상 아나그램으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 예수의 생애를 잘 알았다면, 그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당연히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로는 예수의 생애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말을 단 한 번만 인용한다. 그 인용문은 현재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와 성공회 [[감사성찬례]]], 그리고 개신교의 [[성만찬]]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 고린토 제1 서 제11 장 제24 절에서 제25 절 (공동번역성서) 바울로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 사람은 예수가 '잡히시던/배반당한 밤에'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고자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ivered up)' 때에 그렇게 말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희생양|파르마코스]]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이 주장은 잘못되었다. 바울로 서신뿐 아니라 복음서들에도 유다의 배반 직전의 장면에서 똑같은 단어인 '파라도시스' 즉 '넘겨주다'가 사용되었다. '내가 예수를 너희 중에 넘겨 주리니...(마26:15)' '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넘겨 주리라)...(마26:21)'.]. 자신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싶을 때는 사복음의 예수의 말이 아닌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예수의 말이 훨씬 유효했을 상황에도, '''구약성경만을 인용한다.''' 천국을 목적해 혼인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울로는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고자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가복음]] 12장 25절).'[* 다만 신학자들은 예수 사후에 50년 즈음(약 서기 80년경)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초본이 정리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로는 64년에서 67년 즈음에 죽었기 때문에 '전승'으로서는 예수의 행적이 당연히 전해졌겠지만, 그것이 체계화한 서간의 형태로서 정리되진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울로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상충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권력자와 세상을 향한 태도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당하겠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제16 장 제33 절)'고 언급하여 세상의 권력자나 집권층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 자신도 공회나 사제 [[가야파]]나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뜰 안에서 그 사람들의 권세에 굽힌 바가 없다. 물론 바울로가 예수에게 계시받았다고 예수의 생애까지 세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예수를 직접 만난 적 없이 사도의 구전과 서간을 이용해 접하였으니 쉽게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게 말한다든지 아예 자신이 익숙했을 구약성경에만 의존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의 일생을 자세히 모른다고 해서 예수의 가르침까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비약하자면 바울로는 예수에 관해 많이 알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전파하는 것에 예수의 이름을 도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주류 문헌 비평가들과 성서 연구가들은 이쪽을 지지한다. 예수를 실존한 하나의 윤리에 관계된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상 예수를 다루는 시각에서 보면, 바울로는 철저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바트 어만[* 신약성경 본문비평학자 브루스 메츠거의 제자이다.]은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바울로는 분명히 예수를 실존했던 인물로 믿는다고 말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신화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바트 어만은 바울로가 예수를 실존한 인물인지 실존하지 않은 인물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역사상 진짜 예수를 대해서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도 왜 사도 바울로가 '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온다'고 주장하는지를 다룬 이유도 나와 있다. 사실 신화론이 제시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로의 신학자로서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도로서의 비중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서술하는 신학자로서의 비중으로 국한해서 본다면 이 부문에서 바울로보다 비중이 큰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당장에 신약성경 내의 서간문들 중 대다수를 바울로가 작성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바울로 본인은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한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무리 바울로가 당시 가장 높은 식자층의 일원이었다고 해도 신약성경의 신학적인 부분들이 [[12사도]]들이나 아니면 적어도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했던 이들이 아니라 분명히 이방인이었던 바울로가 주도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