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지원(실학자) (문단 편집) == 생애 ==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어 [[사도세자]]의 스승을 맡기도 했던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의 셋째 아들 박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이다. 박지원의 가문인 반남 박씨는 본래 서인으로 [[노론]], [[소론]]이 갈릴때 박필균이 [[노론]]의 편을 들었고 박필균이 노론 중에서도 탕평책에 반발하는 골수 노론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박지원의 가문은 노론의 벌열이 된다.[* 박필균의 재종조부이자 스승인 [[박세채]]가 소론이었음에도 박필균은 노론을 선택했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친족인 박필현, 박필몽 등이 연루되었을때는 아예 자기 이름을 필현에서 필균으로 고쳤다. 사실 박세체 본인이 소론이었을 뿐이지 그의 문인은 대부분 노론이 되었기에 박필균이 노론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박필균은 [[청백리]]로도 유명했으며 박지원의 아버지 박사유도 음서로 말직에 나갔을 뿐이기 때문에 박지원이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서울특별시|한양]]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박지원의 8촌형이자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던 [[박명원]]은 옹주와의 결혼 이후 뒷말을 피하려고 발길을 끊은 박필균을 두고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박필균과 박명원은 선조의 딸인 [[정안옹주(선조)|정안옹주]]의 후손이다.),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박필균은 5세에 부친을 잃어 사촌형인 금녕군(錦寧君) 박필하(朴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박명원은 박필하의 둘째 아들 박사정의 아들이었다.)은 생각지도 않는가'하며 그를 원망했다고도 한다. 또 박필균은 사사로운 선물 조차도 거절하고 되돌려보내 노론내 정적들이나 소론, 남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또한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것 역시 기피하여 후일 노론 내 다른 인사들이 정조 즉위 후 숙청당하거나 추탈되었을 때 그의 자손들만은 무사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들은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탓에 아무런 직책이 없었으므로, 그가 늦게까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가사를 이끌어갔다. 타계한 이후에도 재산이 없어 장례를 치루기도 벅찼다고 한다.] 박지원은 [[영조]]로부터 신임을 받으면서도 [[외척]]이라는 혐의를 피하고자 애썼으며 청렴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으며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실학자)|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해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으며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 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에도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759년 어머니, 1760년 할아버지, 1767년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 제도|과거]]의 뜻을 접었다. 하지만 실제 박지원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이유는 벗인 이희천의 죽음으로 보인다. 이희천은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1771년 처형되었다.[* <명기집략>에는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조(조선)|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했을뿐 아니라(조선이 이 문제를 얼마나 민감하게 생각했는지는 [[종계변무]] 참조) [[인조]]가 [[광해군]]을 불에 태워죽였다고 기록하는 등 사실을 왜곡해 [[인조반정]]을 비판했다.] 그런데 당시 한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주린의 또다른 저서이자 역시 조선 [[왕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은 <강감회찬(綱鑑會纂)>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이희천의 죽음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희천이 읽었던 <명기집략>은 사실 박지원의 8촌 형이자 [[화평옹주]]의 남편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의 것이었는데 박명원은 별다른 추궁도 받지 않고 넘어갔다. 이회천은 금서를 읽어서 죽은게 아니라 노론 계열이라서 죽은 것이다. 이회천이 주린의 책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죽은게 영조 41년인데 영조 37년 7월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영조 본인이 주린의 또다른 저서인 <봉주강감(鳳洲綱鑑)>을 친히 가져다 강독케 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참 전에 주린의 책 내용을 알았으면서도 수 년간 묵혀놓다 나중에 터트린 것이었다. [[영조]] 대에는 [[청나라]]와의 사행길에서 상행위가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그 중에는 서적 구매도 있었다. 구입 목록 짜서 말이 안 통하면 손짓발짓 해가며 얼마나 열심히 구입하고 베끼고 서로 판본을 비교해가며 맞추는 통에 청나라에서 소실된 책이 조선에 가면 있을 정도로 도서 구입이 성황이었다. 이때 유통된 서적들은 성리학 경서뿐 아니라 소설도 무척 많았고 각종 잡서나 비공식 사찬 사서도 많았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문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이 역관 [[가문]]과 연계해 많은 책을 사모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경화세족과 노론이었다. 영조는 문체반정과 같은 맥락으로 신서적 유통과 이를 통한 의식 변화를 통제하고 [[탕평책]]에 줄곧 비판적이었던 노론 청류계 지식인들의 기세를 꺾어놓고자 일부러 일을 계속 키워서 관련 [[사대부]] 중에서 노론계인 이회천을 콕 집어 죽였다. 박지원은 벗 이희천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음에 틀림없고 산송 문제로 과거를 폐하기로 한 후로도 감시(監試)에 수석 합격하기도 했으나 이희천이 처형당한 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 김윤조 교수는 과거 포기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희천과의 우정에 기초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울분의 표출에서 찾는 것이 기존에 확인된 박지원의 행동 양식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1768년 한양의 [[원각사지 십층석탑|백탑]](白塔, 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현재의 [[종로구]] [[계동]]. 박규수의 집으로 알려진 [[헌법재판소]]는 박지원 사후 아들인 박종채가 옮긴 집.] 박지원 주변에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모임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 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과 학풍을 이룩하니, 이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살 [[생일]]이 있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를 파견했는데 사신단장으로 박지원의 8촌 형인 박명원[* 박명원은 화평옹주의 남편으로 국왕 [[정조(조선)|정조]]와는 고모부 관계였다. 이런 [[중국]] 사신단은 왕의 친인척이 사신단장으로 가는게 [[외교]] 관례였다.]이 파견된다. 박명원이 자신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박지원을 임명하면서 박지원은 청나라로 가게 된다. 5월 25일 조선을 출발해 8월 1일 [[베이징시|베이징]]에 도착, 8월 5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다가 건륭제가 열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4일만에 500리를 달려 8월 9일 열하에 도착하는 등 강행군으로 고생하다가 10월 27일 한양에 돌아왔다. 연행에서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 체계에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人倫)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때 열하에서 [[판첸 라마]] 6세도 접견한다. 박명원은 판첸 라마에게 절하라는 건륭제의 요구에 고민 끝에 그냥 주저 앉아버리는 식으로(...) 대처했는데, 다행히(?) 건륭제가 매우 삐진 정도로 끝났고, 대신 사행단의 귀국길은 청나라의 홀대로 대단히 고되었다고 한다. 건륭제가 내려준 불상은 아예 외교문제가 되지 않도록 압록강을 건널 때 버린다.] 박지원은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소설)|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청나라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 및 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 비평서였다.[* 당시 박지원은 조선으로 돌아와 자기 집 정원을 중국식으로 꾸며놓았다고 전해진다.]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 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 의식에 반기를 든다는 점 때문에 찬반 양측에서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지향한 정조도 1792년 그에게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근데 결국 안 썼다~~ 이 시기 그는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년에 이르면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박지원 특유의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이며 타협적인 성격으로 기울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과 [[함양군|안]][[거창군|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와 의릉령(懿陵令), 1797년 [[당진군|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에 응해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 생산 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박지원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1800년 [[양양군|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8세에 눈을 감았는데 손자가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사후 부여받은 [[시호]]는 문도(文度)로 [[순종(대한제국)|순종]] 3년 8월 20일 [[정약용]], 권돈인, [[남이]] 등과 함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는 [[북한]] 땅인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이북 5도 위원회 기준 행정 구역으로는 진서면(津西面). 금릉리와 어룡리는 수복되어 있다.] 대세현(大世峴)에 있으며 1999년 [[김정일]]이 [[개성시|개성]]을 찾았을 때 유명인 묘들을 단장하라는 명령에 따라 [[황진이]]의 묘와 함께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