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스코틀랜드 침공 (1332~1337) === [[파일:edward and balliol.jpg |width=330]] >[[로버트 1세|로버트 경]]이 우리 민족을 구원했고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므로 우리는 왕국의 법과 그가 쌓은 공로 때문에 그를 신하로서 섬기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따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작했던 일을 포기하고 우리 왕국이나 민족을 잉글랜드 왕이나 잉글랜드인들에게 바치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체 없이 그를 그 자신의 권리와 우리의 권리에 대한 배신자이자 우리의 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고작 백 명의 스코트인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 잉글랜드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영광도 부유함도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유, 의로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 >아브로스 선언, 1320년 >프랑스의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의 왕이 스코틀랜드인들을 모욕하는 일에 그토록 힘써왔으므로 그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 >헨리 나이튼의 연대기 이런저런 갈등이 씨앗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필리프 6세는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확립한 프랑스 국왕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331년부터 십자군을 준비한다. 목적지인 레반트의 도시들에 첩자들이 파견되었고, 왕실 기술자는 공성무기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상이 이루어졌다. 결국 출항일이 1336년 8월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1332년 8월 11일,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왕위주장자 에드워드 발리올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다섯 배가 넘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고 9월 24일 스콘에 입성해 대관식을 치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얼마 못 가서 발리올은 휴전 조약을 맺고 방심한 틈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기습을 받고 칼라일로 쫓겨났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를 끝장낼 기회로 여기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발리올과 그의 동맹인 잉글랜드군이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로우랜드를 장악하자 어린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한편 필리프의 [[매제]]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부터 아르투아 백작위를 빼앗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수배중이었는데, 에드워드는 1334년 봄에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활한 음모가인 로베르가 어린 에드워드를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왕위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지만, 당대 잉글랜드측 연대기나 공문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가설은 나중에 잉글랜드로도 건너와 후대의 잉글랜드 작가들에게 수용된다. 필리프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주요 동맹국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인 잉글랜드 왕을 뒤에 남겨두고 원정을 떠날 수 없었다. 1334년 5월 에드워드는 생사르도스 전쟁으로 몰수된 땅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신도 십자군에 동참하겠다는, 스코틀랜드만 제외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절충안을 내놓지만 필리프는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동정심 또는 왕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거부한다. 그는 아직 십자군 왕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잉글랜드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스코틀랜드의 저항군에게 동맹으로서 자금을 지원하고 영불해협에서 스코틀랜드와 노르망디 사략선의 활동을 허가하는 등 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의 지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1334년 8월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발리올이 또다시 쫓겨났다. 에드워드도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지만 유난히 혹독했던 그해 겨울 날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이듬해 7월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로우랜드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다. 이에 필리프는 시테 왕궁에 모인 관료들 앞에서 선대 왕들이 스코틀랜드와 맺은 동맹 조약을 언급하며 스코틀랜드에 중기병 1000명이 포함된 6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어쩌면 스코틀랜드가 다시 침공당한 동시에 자신의 [[장 2세|유일한 후계자]]가 중병에 걸려 쓰러진 일을 신이 내린 벌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8월에는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선원들을 태운 사략선 3척이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마을들을 습격했다가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필리프가 누구의 편인지는 분명해졌고, 정부의 지령을 받는 잉글랜드의 교구 사제들은 미사 시간마다 '스코틀랜드의 배후에 있는 외국 동맹군'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공동 중재자 역할을 제안했지만,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교황은 노골적으로 데이비드 2세의 편을 들고 있는 필리프에게는 중재자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며 혼자서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필리프 6세와 데이비드 2세는 결국 발리올과 에드워드 3세 측이 제안한 모든 협상안을 거부했고, 1336년 4월 에드워드는 휴전 기간이 끝나는 즉시 스코틀랜드를 재침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파견한 중재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교황은 필리프에게 십자군을 취소할 것을 제안했다. 1336년 6월 에드워드는 약속대로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대군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이제 프랑스군의 스코틀랜드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병을 포함한 수천 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북동부의 비옥한 해안 평야뿐이었다. 에드워드는 800명의 병력만 이끌고 해안가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경작지를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수도원의 식량창고를 약탈한 뒤 마지막으로 [[애버딘]]을 철저히 파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된 프랑스 남부 함대가 노르망디에 도착해서 북부 함대와 합류했으며, 8월 20일 파리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필리프는 이 함대로 잉글랜드를 침공해 동맹인 스코틀랜드인들을 해방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바로 프랑스 군함이 와이트 섬과 서퍽주의 해안을 습격해서 마을과 도시를 불태웠고, 가스코뉴 국경에도 새로운 세네샬이 임명되는 등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반역죄와 아키텐 공작위 몰수를 선언하기 위한 밑작업으로 파리고등법원은 우선 나바유 영주가 에드워드에게 제기한 소송에 대해 3만 플로린이라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12월에는 문서위조범 아르투아의 로베르의 신병을 양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맞서 에드워드도 1337년 2월 가스코뉴를 방어하기 위한 함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 해안을 불태운 작전이 너무 성공적이었는지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상륙시킨다는 처음의 계획을 바로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기껏 모인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마을들을 불태우는 의미 없는 무력시위만 반복했고 에드워드는 이를 잉글랜드 내부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잘 활용했다. 이제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인들의 오랜 원수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스코틀랜드에 프랑스군이 이미 상륙해 있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순례자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항구에는 군함 700척이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337년 4월 30일 신민소집령(arriere-ban)이 프랑스 왕국에 선포되었고, 곧이어 파리에서 열린 대심의회는 반역죄를 저지른 에드워드의 아키텐 공작위를 몰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7월경에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마을과 소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지만 끝내 요충지에 자리 잡은 요새들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에드워드와 그의 동맹들은 프랑스 북부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평소 필리프 6세를 '자칭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며 공공연히 깎아내렸는데, 이 명칭은 1337년 10월부터 잉글랜드의 공문서들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반역 혐의를 반박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대한 필리프의 주권을 부정하기 위해 그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아직 스스로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자칭 왕일 뿐이라면 진정한 왕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신중하게 무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