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년전쟁 (문단 편집) === 독일 저지대 국경 분쟁 (1330~1338) === [[파일:Edward_III_becomes_Vicar.jpg |width=550]] >제국의 모든 영주들이 할레 시에 모여 오랫동안 논의한 뒤 잉글랜드 왕에게 말했다. "전하, 프랑스 왕은 제국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고대 법령이 있습니다. 지금 필리프 왕은 캉브레지의 크레브쾨르 성, 아르투아의 아를뢰 성, 그리고 캉브레 시를 소유하고 있으니, 우리의 명예를 위해 황제의 동의를 구해주십시오." >그 후 황제의 칙령이 공개적으로 낭독되었고, 이로써 잉글랜드 왕은 황제의 대리인이자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모든 신민에게 법과 정의를 집행하거나 금과 은으로 돈을 주조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독일 저지대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13세기부터 이미 프랑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해 있었다. 직물 산업이 발전한 [[브라반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전부 넓은 영토에 비해 생산력은 낮고 인구도 적은 가난한 농업국에 불과했으므로 감히 프랑스 왕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었고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다른 공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적인 동기 외에도 독일의 귀족들 중에는 필리프 6세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훗날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처럼 프랑스어를 쓰며 프랑스의 궁정 문화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었다. 브라반트 공국은 1278년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아키텐 공작위 몰수로 시작된 전쟁이 필리프 4세의 판정승으로 끝나자 1303년부터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켰다. [[에노]] 백작 기욤은 심지어 에드워드 3세의 장인이었지만 1328년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카셀 전투에도 참전했다. 캉브레 주교는 부르고뉴 출신으로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아 주교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1330년대 초부터 저지대 지역 전체가 왕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프랑스 상서성(Chancery) 관료들의 급발진은 프랑스에 호의적인 군주들마저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1337년 2월 필리프가 프랑스와 저지대 공국들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캉브레 시와 주변 성채들을 구입하자 불안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도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명목상 봉신인 캉브레 주교에게 거래를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주교는 그냥 무시해버렸다. 저지대의 군주들은 필리프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공국에 간섭할 빌미를 주기는 싫었으므로 대신 프랑스 왕의 맹렬한 적이자 에노 백작의 사위인 잉글랜드 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편 에드워드는 1337년 초까지만 해도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방어할 계획이었지만, 의회는 언제라도 잉글랜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왕이 주력군과 함께 원정을 나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며 그렇게 멀리 떠나있으면 위급할 때 제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렇게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1337년 8월 [[발랑시엔]]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된 사절단이 저지대 군주들과 독일 황제가 동맹의 대가로 요구한 조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솔즈베리 백작을 비롯한 [[추밀원|왕의 고문들]]은 과거 에드워드 1세가 독일인들에게 당한 배신을 상기하며 그들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에드워드는 무시했다. 그는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며 곧 군대를 이끌고 저지대에 상륙해서 11월 30일까지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전비 조달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지연되었다. 프랑스에 대한 반감이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기는 했지만 당장 [[영불해협]]을 넘나드는 함대를 어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에게 20만 파운드를 바치면서까지 바다 너머의 프랑스 영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원정이 지연되면서 12월부터는 에드워드가 독일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27만 파운드로 늘어났다. 그해 의회에서 승인된 약 5만 파운드의 전쟁세는 전부 저지대와 이탈리아의 은행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고, 에드워드의 유일한 희망은 양모에 부과된 관세뿐이었다. 양모 관세 수입은 평시에는 13000파운드였지만 에드워드 1세 시절에 이미 의회의 승인을 받고 6배까지 늘린 전례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완벽한 계획이 준비돼 있었다. 우선 잉글랜드 전역에서 양모 3만 자루를 최저 가격으로 징발한 뒤, 작년의 수출금지령으로 가격이 폭등한 양모를 왕실과 계약을 맺은 잉글랜드 상인들이 저지대 도시들에 가져가 비싸게 팔아넘기며, 그 수익의 절반을 챙기는 대가로 20만 파운드가 마련되는 즉시 왕에게 대출한다. 이렇게 해서 왕실은 간편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잉글랜드 농촌의 소작농들과 지주들은 조금 낮은 가격이지만 양모값을 받고, 무역상들은 큰 이익을 얻으며, 외국인들만 고통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농민들의 저조한 참여 때문에[* [[백년전쟁/제1기 (1337-1360)]] 문서에 언급된 1339년 10월 의회 하원의 청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지방민들은 공권력을 등에 업은 관료들과 도급업자들에게 최저 가격으로라도 제값을 받아낼 수 있을지 처음부터 의심했고, 신뢰를 주어야 할 정부는 정작 바로 뒤의 사례처럼 수틀리면 법령이든 계약이든 마음대로 뒤집었다.] 양모 징발과 운송이 지연되자, 조급해진 왕실 관료들은 저지대에 양모 1만 자루가 도착한 즉시 모든 양모를 거둬서 현지 상인들에게 직접 팔았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당장 필요한 27만 파운드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대부분 그저 행정 실무를 익힌 법학자나 신학자들이라 상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호구만 잡히고 4만 파운드밖에 못 벌었다. 수출금지령 이전 저지대에서 잉글랜드 양모 시세는 자루당 6에서 10파운드 사이였으니 최젓값도 못 받은 것이다.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일방적으로 파기되면서 남은 2만 자루를 받지도 못하게 됐고 정부의 신용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필리프는 독일에 많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저지대 군주들이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이나 프랑스 북부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했지만 잉글랜드 내부의 최신 정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337년 9월 프랑스 정부 고문들은 11월쯤 연합군의 침공이 시작될 것이라 확신했고, 분노한 왕과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군사를 소집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7월부터 가스코뉴를 침공해서 이제야 간신히 보르도 포위전을 시작한 프랑스 남부군은 북부 전선에서 왕의 군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군한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에드워드의 대담한 결단은 결과적으로 가스코뉴를 침공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338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상인들과 맺은 계약이 파기된 뒤 남은 양모 2만 자루를 징발하겠다는 왕의 요청을 승인했고, 7월 22일 에드워드는 결국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드워드를 맞이한 저지대 군주들은 거의 반년 동안 징발된 양모가 3000자루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8월부터 전쟁세 평가 금액을 기준으로 해서 헌드레드마다 양모 할당량을 부과한다는 특단의 조처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돈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동맹들에게 약속한 보상의 일부라도 지불하기 위해 대관식 왕관을 저당 잡히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슬슬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치솟은 저지대 군주들은 황제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기 시작했고, 황제 자신은 필리프와 협상 날짜까지 잡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한 에드워드는 12000파운드를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 황제에게 약속한 돈의 1/5인 600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다행히 기분이 풀린 황제는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프랑스 침공은 이듬해 7월로 예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