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문단 편집) === 근대 === [include(틀:프로이센의 주)]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1806~10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육군|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와중인 1810년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등의 노력으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베를린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베를린 대학교는 "훔볼트식 모델"이라 하여 근대 대학시스템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우리가 현재 구분하고 있는 전공 학부구분과 박사학위 시스템등이 베를린 대학교에서 실험적으로 도입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유수 연구중심대학들이 모두 훔볼트식 모델을 [[북아메리카]]에 최초로 도입한 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을 벤치마킹하여 성장했고, [[오세아니아]]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호주국립대학교]]도 존스 홉킨스 대학교를 본따 설립됐음을 생각해보면 훔볼트식 모델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일류 석학들을 모아 독일 각지의 역사깊은 대학들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독일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빈 체제]]하에서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기 시작,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인구 20만에서 1861년에 55만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30년 전쟁 직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가 구축했던 성벽을 해체하여 도심을 확장시켰다. 1871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프로이센 왕국을 주축으로 한 [[독일 제국]]이 출범하자 신생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인구 82만 6천 명이 되었다. [youtube(B-m9A8mY-U0)] [youtube(QhPR6fa68EY)] 1910년대 독일 제국의 수도 베를린의 모습. [youtube(Es6f7K4c-y8)] [youtube(R5i9k7s9X_A)] 1936년 나치 독일 시기와 패망 직후 연합군 군정 시기의 모습. [[빌헬름 2세]] 치세 말기인 1910년, 베를린의 인구는 207만 6200명으로 늘어났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1920년 10월 수도 대확장을 통해 원래 면적의 '''12배'''가 넘는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http://en.wikipedia.org/wiki/Greater_Berlin_Act|관련 영문 위키백과 문서]] [[http://www.verfassungen.de/de/be/berlin20.htm|베를린 대확장 법령 독일어 원문]][* 이걸 이해하려면 1963년 1월 서울 대확장을 생각해봐도 될 듯하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경계가 이때 거의 완성되었고, 이후의 추가 편입은 1973년에 이뤄진 구파발 일대에 불과하다.] 1920년대 초 독일과 베를린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큰 고통을 받았고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지만 20년대 중반부터 빠르게 회복해 나갔다. 1920년대 말 베를린은 이전처럼 유럽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회복했다. 이 시기 베를린에는 놀렌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를 중심으로 지식인과 예술가, 소수자들이 모여들었다. 베를린에 수백개가 들어선 [[카바레]]는 전후 도발적인 문화의 상징이었고, [[성소수자]]들이 잡지를 내는 등 양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