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산일보 (문단 편집) === 1988년 7월 파업투쟁 === 19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 노동자 대투쟁은 언론민주화의 텃밭 자리를 형성케 했다. 이미 6월항쟁 당시 시위대가 던진 돌로 본사 유리창이 박살나면서 젊은 기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점차 각성했고, 1988년 1월 22일에는 기자 47명이 노조를 결성해 [[조영동]] 기자를 노조위원장에 선출하여 다음날 노조 설립신고를 냈다. 6월 11일에 노조 측은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신고를 내고 7월 11일부터 '편집권 독립'과 '윤임술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윤 사장은 단 한 차례도 교섭에 나오지 않았고, 정수장학회와 사측 역시 이를 수용하지 않자 전면 파업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간 이래 처음으로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으며, 이에 따라 노조 측은 <쟁의특보> 50만부를 내서 독자들에게 배부하였다. 국내 언론사상 최초로 벌어진 이 파업은 당시 전국적 관심을 모았는데, 전국 언론사 노조들은 일제히 지지를 내비쳤고 부일의 몇몇 간부사원들도 노조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또 동아일보 역시 부일의 소유권이 정수장학회로 넘어간 경위가 문제시될 것이라고 하여 정수장학회 존립의 정당성 문제까지 제기하였다. 파업 6일째인 7월 16일, 정수장학회는 윤임술 사장 해임결정을 통보했고, 송정제 전무 등 사측인사 5명과 조 위원장 등 노조대표 5명이 첫 단체교섭에 들어가 '편집국장 3인 추천제' 등 단체협약안을 타결해 최초의 자유언론 실현을 제도화하여 6일간의 파업을 끝냈다. 7월 19일에는 창사 최초로 노조측 추천자인 정추회 주간국장이 편집국장에 임명되었고, 10월 24일에 노조는 제2회 안종필언론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1988년 7월의 투쟁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신문사 소유권이 정수장학회로 넘어가면서 '숙명적 여당지'라고 자조할 정도로 친정부 논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구성원들의 오랜 불만이 민주화 국면에서 '편집권 독립 쟁취'라는 열망으로 나타난 것이며, 이 파업의 성과는 선례가 되어 타 언론사 노조들도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