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 (문단 편집) === [[동아시아]] 불교 전파와 발전 ===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본격적으로 흥성한건 [[위진남북조시대]]로 특히 [[서진]] 멸망 이후부터 명 시대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였다.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러나 불교의 전래 당시,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와는 맞지 않아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후 [[남북조시대]]가 열린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불도징(佛圖澄, 233~348)과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 312~385)의 활동에 의해 교단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불도징은 [[쿠차|구자국(龜玆國)]] 출신의 [[서역]]의 승려로 310년에 낙양으로 와서 [[후조]] 시대에 활약하였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 시기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경이 크게 유행해 중국 불교의 흥성을 주도했으며 [[보리달마]] 같은 서역승려들이 남조에서 불교를 크게 전파했다. 북조에서는 [[삼무일종법난]]으로 대표되는 폐불 사례도 있었으나 남조에서는 폐불 사례 없이 꾸준히 불교가 발전했다. 수당 시기에는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을 이룬 한편, [[선종]]과 [[정토교]]는 이들이 미친 영향으로 보면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송나라 시기에 선종은 정토교와 함께 송나라 시대 이후의 중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밀교]] 교리도 성행했다. 이렇게 번성하던 중국 불교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종교 통제에 직면했으며 [[문화대혁명]]때 법난의 절정에 달해 중국 불교계는 일대 타격을 입었다.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중일 수교 이후 일본 불교계와의 교류가 늘어나 중국 불교계는 조금씩 회복되는 추세이지만 관제불교의 오명을 벗지는 못하고 있다. 중국 불교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가신 이후로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 내 불교 신자는 최소 2억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 몇 년 내에 4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세계 불교 신자가 3~4억 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 불교의 위상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불교는 중국불교협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잃어버린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동남아는 물론 세계 불교계에서의 주도권 쟁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불교포럼을 주최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 자세한 사항은 [[중국/문화]] 참조. [[한국의 불교]]는 기원후 4세기와 5세기경 [[삼국시대]]에 [[동진]]과 [[남북조 시대]]의 중국을 거쳐 들어왔고 토착화되면서 [[한국인]]에 맞는 [[한국]]적 특성을 지닌 종교 사상이 되었다. 기록 상 최초의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소수림왕 전 시기에 불교가 상당 부분 고구려 각처에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 [[신라]]도 각각 뒤이어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율령 체제 정비와 그 궤를 같이한다.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한국의 정신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기조로 쇠퇴하기도 하였다. 근대 이후엔 다시 불교의 진흥이 이루어졌으며 현대 한국 불교의 주류는 선종이다. 해방이후 비구승-[[대처승]] 분쟁이후 비구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정립되었고, 조계종은 현재까지 한국 불교의 대표 종단이다. [[일본]]의 경우 6세기에 백제로부터 전래되었는데 나라에서 대불개안을 시작하고 [[삼론종]], [[화엄종]] 등 6개 종파가 형성되었다. [[쇼무 천황]] 때에 [[당나라]] 승려 [[감진]]이 일본에 들어와 일본 불교의 초석을 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794년 [[간무 천황]]의 [[교토]] 천도에 이어 [[견당사]]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구카이]]와 [[사이초]]가 각각 [[진언종]], [[천태종]]을 창시하여 일본 불교에서 [[고야산]], [[히에이산]] 등의 비중이 커졌다. 그리고 정토신앙의 유행으로 아미타불 신앙이 보편화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가 귀족에서 권력을 빼앗고 힘을 순조롭게 기르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임제종과 조동종이라는 두 선종이 잇따라 중국에서 소개되었다. 힘을 길러 가고 있었던 사무라이 집단이 선호한 것에 기반해 가마쿠라 등 많은 선사가 지어져 매우 번창했고 전국시대에는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 등 세속적인 권력을 가진 거대 불교교단들이 잇키를 일으키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히에이산 초토화는 전설이 되었다.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불교와 관련하여 사사제법도를 정하였다. 또한 1654년 명나라에서 건너온 승려 은원이 황벽종을 창시하였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의 최대 불교 종파는 정토진종이었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 세워진 일본 정부는 [[국가신토]]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신억불(崇神抑佛) 정책을 펴 일본 불교계는 초유의 난관을 겪었다. 전국 각지의 사찰은 폐쇄되기도 하고 철거되기도 하고 매각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불교계는 이런 탄압에서 벗어났으며 1951년에는 종교법인법이 제정되어 이후 각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진남북조]] 시절 한족 지식인들의 염세주의, 유목 정복왕조의 중화주의 견제를 위한 불교 진흥 정책이었으며, 이와는 별 관련이 없던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진 계기는 '''왕즉불 사상''' 때문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을 강화할 명분을 만들어주어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사실 왕즉불 사상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정도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상에 완전히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 생각해 볼 점은, 석가모니같이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입장과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 정치가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제]]의 [[성왕(백제)|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불상]]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왕 부처'(海東天子當今帝佛)라고 칭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