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무라이 (문단 편집) === 의리와 [[부시도|무사도]] === 각종 픽션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과 의를 다하는 것처럼 묘사되며 실제로 그런 사무라이들도 있었지만, 사무라이도 엄밀히 사람이었기에 많은 경우 주군이 함부로 행동하거나 가진 영토에 비해 군주로서 다스릴 능력이 미약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립하거나 주군을 배신하며 동맹을 공격하는 등 배신을 일삼는 사무라이들도 많았다. 충과 의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후에 에도 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강조된 것이고 전국시대에는 적 앞에서 방심하면 등 뒤에서 찌른다거나 배신을 하거나 동맹을 깨거나 하는 일도 몹시 흔한 편이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무사도에는 [[유교]] 사상의[* 당대 일본에서 가장 유행한 유학은 임진왜란 후에 전해진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조선)|이이]]의 이통기국설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에도 막부가 가장 원했던 것으로써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문제는 명목상 군주는 덴노였고 유교적 이념 때문에 막부는 [[대정봉환|실각]]한다.] 영향이 크다. 그 전이라고 무사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다만 에도시대 이전의 무사도는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희한한 형태로 지켜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은혜를 갚거나 원한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난데없이 [[갑툭튀]]한 사람이 '내 은인!' 혹은 '내 원수!' 하면서 일이 터지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유럽에서 기사의 시대가 지나고나서 기사도 로망이 유행하며 기사도가 발생한 것처럼[* 서양에서 흔히 중세 시대하면 떠올리는 중세 전성기(11세기 이후)때는 기사 계급의 준귀족화가 진행되며, 기사도가 생겨나고 있었고 기사의 시대가 끝나기까지는 그 후로 수백 년이 더 흘러야 했기 때문에 기사의 시대가 끝나고 기사도가 생겼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무사도 또한 무사의 시대가 지난 에도 시대에나 발생한 개념이다.''' 현대에 알려진 멋진 무사도는 사실 옛날을 동경하던 에도 시대 '''[[공무원]]''' 사무라이들이 유학사상과 버무려낸 통치계급적 내용에서 직접 유래했고, 메이지 시대의 [[니토베 이나조]]가 유학중 서양의 기사도에 영향을 받아 역사적인 사실에 국뽕을 적절히 버무린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라는 그의 저서에서 작성한 내용도 있으며, 그걸 가장 잘 나타내는 희곡 <[[충신장]]>이 결정타를 쳤다. 문제는 이걸 [[일본 제국]]과 [[일본군]]이 절대의 국시이자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국주의 시절의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무사도 숭배로 악용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사무라이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무사도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