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무라이 (문단 편집) == 사무라이 계급 ==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무라이 이미지는 [[일본 갑옷|전신 갑옷]]을 입고 말 타고 칼로 싸우는 이미지이며 실제로도 처음에는 기병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부터는 일본 내에서 말 수급도 어렵고 양성기간도 긴 기병들이 쇠퇴하고 대신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보병들로 주력 병종이 대체되었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무라이들도 보병화되었으며 이들은 칼과 활, 창을 주력으로 가지고 다녔다. 무로마치 시대의 전사상자 비율을 본다면 스즈키 마사야는 화살 87%, 칼과 나기나타 8%, 투석 3%, 창 1%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토머스 콘랜은 말은 화살 61%, 칼 35%, 창 3%이며, 사람은 화살 73%, 칼 25%, 창 2%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덤으로 백병전에서 칼에 의한 부상 비율은 92%라고 콘랜은 설명하였다. 전국시대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여름의 진과 겨울의 진이 지나 사무라이가 관료화 되는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전투가 필요없어지자 칼 자체도 [[정장]]의 소품화가 되어 칼을 두 개 차고 다니는 것은 사무라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전쟁할 일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무라이들의 범죄를 막기 위해[* 그럴만한것이 칼을 항상 들고 다니기 때문에 수틀리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남았다.] 함부로 칼뽑고 살인했다가는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지며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신분강등 당하는 [[에도 막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칼을 뽑을 일조차 없어지자 칼날 없이 칼손잡이와 칼집만 차고다니거나, 모양만 잡아주는 날 없는 쇠만 끼워넣고 다니는 등 정말로 소품이 되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칼날은 녹이 슬지 않도록 집에 따로 보관해두었는데, 이를 [[시라사야]]라고 한다. 이때의 사무라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전쟁에 나갈 때 말타고 나갈 자격이 있는 중급 기마(騎馬, 키바) 무사이고 그 밑에 하급 도보(徒, 카치)무사가 있었다. 사무라이의 다음 계급은 '[[아시가루]]'가 있다. 출판물에 따라 최하급 사무라이로 번역하기도 하며, 농민과는 엄연히 신분이 다른 무사의 일종이다.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생각하는 [[삿갓]]맨들이 바로 아시가루다. 아시가루처럼 걸어다니지만 무장도 좀 좋아보이고, 삿갓 대신 투구다운 것을 쓰고 있으면 카치 사무라이, 말타고 있으면 기마무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키바, 카치, 아시가루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것이 상급 무사라고 할 수 있는 [[하타모토]]이다. [[고쿠다카]]가 200석[* 하타모토의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하로 꼴랑 카치 1명, 창병 아시가루 1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짐꾼으로 3명을 대동한다.]인 하타모토에서 9,000석[* 이 정도면 부하로 키바(기마 무사)만 11명에 카치 14명, 아시가루 64명을 거느리는 집단의 대장이다. 또한 깃발잡이와 종자, 짐꾼 등을 합쳐 총 189명을 거느린다. 다시 말해 사무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무라이가 아니었다.]인 하타모토까지 다양했다.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라고 칭했다. 도식화 해보면 아시가루 < 카치 < 키바 < 하타모토 < 다이묘 순이 된다. 각 무사들은 코쿠다카(石高, こくだか)라고 하여 영지를 지급받았다. 1석이 1,000홉이고, 인간이 1년 365일동안 1홉씩 3끼를 먹으니 대략 코쿠다카 1석당 1명은 인간을 부양할 수 있다고 본다.(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보니 조선 사람들은 1일 2끼, 한번에 7홉씩 먹었다.) 즉 고쿠다카가 1만석짜리 땅이면 1만명의 영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이 고쿠다카 생산량 중 70%를 다이묘가 가져갔다.[* 4공6민이라 하여 40%는 다이묘가 가져가고, 60%는 농민이 가져가는 경우는 예외적인 선정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고쿠다카에서 70%를 다이묘가 가져간다는 뜻이, 30%로 농민들이 살아갔다는 뜻은 아니다. 각종 부역, 그외 여러 활동에 다이묘들이 농민을 고용하면서 다시 지불하기도 했으며, 아시가루들에게 녹봉으로 지불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과의 직접 비교는 어려운게 물론 조선은 정부가 농민들에게 직접 걷는 세율 자체는 일본보다 현저히 낮았지만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외거노비에게 경작을 시키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가 후기에는 지주전호제가 정착되어 국가와 농민들 사이에 수확량의 50~60%를 소작료로 걷는 지주 계층이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기본적으로 연공의 일원화가 이루어져 있어서 다이묘&하타모토=국가+지주와 같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일단 자기 영주에게만 세금을 내면 되는 구조였다. 거기에 조선은 군역 또한 농민이 담당했다.] 다만 대부분의 고케닌급은 영지가 아니라 고쿠다카에 해당하는 봉록을 받았다. 그리고 이 코쿠다카를 바탕으로 각자 군역(軍役)이 정해져 있어 전시에 정해져 있는 병사를 데리고 집합하여야 한다. 시대별로 변하지만 대충 200석은 5명, 1,000석은 25명, 10,000석은 250명씩이다. 그러나 고쿠다카 200석 사무라이라고 해서 각자 병사 5명이나 짐꾼 5명씩 데려오면 되는 것은 아니고, 고쿠다카에 따라 병종 비율이 정해져 있어 각자가 소규모 부대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관습, 지역에 따라 제각각이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야 통일성을 갖춘 동원기준이 마련된다. *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 모든 무사의 정점. 좀 어려운 개념인데 쇼군은 최대의 다이묘로 '무사'이긴 하나 사무라이는 아니다. 사무라이는 이름대로 [[높으신 분]]을 '섬기는' 직책인데 쇼군은 높으신 분 그 자체이기 때문. 그래서 쇼군을 '무가의 동량'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에도 시대 중기 기준으로 쇼군 아래로 260명 내외의 다이묘가 있고 다시 쇼군 직속으로 8만여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 [[다이묘]](大名) - 전국시대에는 고쿠다카가 1만석 이상은 다이묘, 그 이하는 쇼묘(小名)라고도 했었다. 전국시대에는 영지가 큰 다이묘의 경우 휘하에 다이묘를 여럿 거느리기도 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지번'이라는 형태로 다이묘 휘하에 다이묘가 존재하였다. 또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대충 1만석당 병력 250명씩을 동원해야 했는데, 임진왜란의 경우 장거리 원정의 한계상 보급부담, 농사 일손 부족 등의 문제로 그 1/2이나 1/3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임진왜란]] 시기의 쓰시마 섬처럼 전장에서 가까운 지역은 오히려 1만석당 병력 500명 가까이를 동원하는 바람에 영지 내 젊은 남자들의 씨가 말라버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절반도 회복못하고 있다. 에도 시대의 1만석 다이묘는 235명(기마 사무라이 14기, 보병 90명, 나머지는 짐꾼 등 잡졸), 10만석 다이묘는 2,155명(기마 170기, 궁수 60명, 철포 350명, 장창 150명, 기수 20명, 기타 짐꾼)의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당시에는 260여명의 다이묘가 총 1,600만석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50만석 이상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10만석 이하였다. * [[하타모토]](旗本) - '''원칙적으로는 다이묘와 대등한 독립영주'''이며, 가문의 격 자체는 약소 다이묘들보다 오히려 높은 하타모토들도 있었다. 다이묘들과는 원칙적으로 서로 '토노(殿)'[* 사람 이름 뒤에 붙여 경칭으로 사용할 때는 [[연탁]]이 붙어 '-도노(どの)'로 발음.] 또는 '토노사마'라고 존칭하는 관계였고 막부의 실질적 재상직인 노중(老中)을 맡는다든지, 축성이라든지 교토조정 칙사의 대접이라든지 조선통신사의 대접 등과 같은 막부의 일을 맡길 때 다이묘가 하타모토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타모토의 경우 전국시대에는 주군의 군기를 지키는 무사단으로 시작해 일종의 근위부대였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며 쇼준 직속의 석고 10,000석 미만의 무사를 뜻하게 되었다. 1704년 기준으로 약 5,300명이 있었고, 각자 부하들을 거느린 부하들 총합이 67,500명이었다. '하타모토 8만기'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는 하타모토와 고케닌, 그리고 그들의 부하인 배신까지를 합쳐 일컷는 것이었으며 가끔씩 개별 다이묘의 가신들 중에서도 석고가 10,000석이 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무리 일개 번의 번사가 영지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하타모토보다는 낮은 신분이었으며, 하타모토는 아무리 석고가 적다고 하더라도 다이묘와 동등한 '토노사마'라는 극존칭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는 존재였다. 영지는 쇼군의 700만석중 400만석을 코쿠다카에 맞춰 나누어 받았다. 가록은 고쿠다카 200석 이상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하도 있어 최소치는 50석 가량이였다. 보통 하타모토는 봉록을 쌀로 직접 받지만 500석 이상은 지행지를 받은 후 이를 대관에게 맞겨 간접 수취 했고, 3,000석 이상은 지행지를 아예 직접 경영하였다. 코쿠다카가 5,000석만 되어도 동원 병력 125명(기마 무사 7기, 보병 40명, 기타 잡병)을 거느리는 작은 다이묘였다. 그러나 이런 큰 규모의 하타모토는 적었고,[* 5,000석 이상 하타모토 33가문.] 대부분이 1,000석(도보무사 5명, 아시가루 3명, 기타 잡병 총 20명) ~ 500석(도보무사 2명, 아시가루 1명, 기타 잡병 등 총 11명)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하타모토의 하한선에 가까운 200석의 경우 부하로 꼴랑 도보 사무라이(카치) 1명, 아시가루 1명(창병), 짐꾼 3명(말구종, 짐말꾼, 갑주 운반꾼) 뿐이었다. 최하 50석 하타모토까지 존재했다. [[시바 료타로]] 선생의 역사소설 '사무라이'의 주인공은 코쿠다카가 달랑 120석이었다. 그래도 어딜가나 벼슬아치라고 대접 받긴 하는데 말단 관료 생활만 할 수 있고 태생적으로 중신까지는 오를 수 없었다.[* 이는 [[과거 제도]]와 같은 표준 공무원 시험제도를 갖추지 못하고 봉건제도의 경직된 신분사회를 유지한 일본 근세사회의 한계이다. 하급 사무라이 집안 태생이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러한 제도를 극렬히 비판하며 천부인권과 만민평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 평화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군역은 명목만 남아서 막부 말기에 가면 사츠마/조슈 번의 반란에 몇 만석의 다이묘들이 각자 몇백명씩 동원하는 게 전부였고 어디까지나 칼을 찬 관료라는 신분으로서만 남았다. 평민 출신으로 공을 세워 하타모토가 된 인물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존 만지로]], [[곤도 이사미]]가 있다. 기마 사무라이(키바)는 다이묘들의 하타모토격으로 역시 각자 코쿠다카를 받았으며 군역이 부과되었다. 기마 무사의 경우도 고쿠다카 200석 이상이지만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가이 다케다 가문에서는 105석 이상, 사이고쿠에서는 500석 이상이 기준이었다. 3,000석급 이상의 하타모토도 예하에 기마 무사를 두고 부릴 수 있었다. 이런 기마무사도 각자 200석급 무사라 예하에 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 [[고케닌]](御家人), 도보 사무라이(카치) - 하급무사. 수는 제일 많으나 인지도 0의 존재. 1704년 기준 무려 1만7천여명이다. 각종 일본소설의 번역에서 하급무사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이들 도보 사무라이이다. 도보는 일본말로 카치로 '카치 사무라이'라고 한다. 센고쿠 시대까지만 해도 서열이 다이묘>고케닌>하타모토였는데 에도 시대로 오며 역전되어 쇼군을 알현할 수 없있으면 하타모토, 없으면 고케닌으로 신분이 하락하였다. 그냥 걸어다니는 무사들로 칼을 쓰기도 하고, 총을 쓰기도 하는 등 경력 있는 말단 보병 역할이었다. 쇼군의 직속 고케닌이 약 1만 7천명에 달했으며, 전국시대까지는 이러한 도보 사무라이도 1명씩 종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는데 에도 시대에는 기마 사무라이 자체가 도저히 군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짐과 마찬가지로 도보 사무라이(카치) 역시 종자를 거느리는 경우가 없어졌다.[* 그래도 몇사람의 고케닌이 공동으로 부담하여 군역 규정에 따른 부하를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신분상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다.[* 즉, 하타모토급 이상만 말을 탈 수 있으니, 하급 무사로 구성된 기마대는 불가능 한 존재다.] 가록은 30~80석이 보통이었으며 많게는 200석이 넘는 자들도 있었으나 최대 400석 이하였다. 가록에 맞쳐서 쌀을 받았으나 200석 이상자 중에서는 드믈게 지행지를 가진자도 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중기 이후 지행지를 가진 자는 하타모토로 승진함에 따라 더이상 지행지를 가진 고케닌은 없어졌다. 또한 능력이 있는 자는 하타모토로 승격하기도 했는데, 하타모토 격의 직위를 3대에 걸쳐서 역임하게 되면 자동으로 신분 승격이 이루어졌다. 돈많은 농민들이 이러한 고케닌의 양자로 들어가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분명 두자루에 칼을 차고 성씨를 사용하는 사무라이 지만, 워낙 안습한 존재들이라 메이지 시대 이후 하타모토들 처럼 '사족'으로 인정 못받고 그냥 평민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었다. 카치 사무라이는 그냥 뚜벅이 무사. 하타모토나 기마 사무라이들이 몇십명씩 거느린다. 이들 역시 사무라이의 일종이라 고쿠다카를 받는데 시바 료타로 선생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집안은 고쿠다카가 겨우 10석이었다. * ~~[[아시가루]](足軽)~~ 대부분의 일본소설에서 이 단어가 나오면 '최하급무사'라고 번역되지만 엄밀히 따져서 사무라이가 아니다. 메이지 시대 다이묘와 [[공경]]귀족들을 재편성해 '[[화족]]'이라 하고, 화족에 편입되지 못한 그 이하 사무라이들을 '사족'이라고 하였는데 아시가루는 그도 아닌 '족졸'이었다. 화족이 아닌 한 사족조차 법령상 평민이었으니, 어디까지나 그냥 평민이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세력의 아시가루였던 집안에서는 출세는 하지 못했어도 예전에 차고 다니던 [[우치카타나]] 한 자루 정도는 가보로 모셔와 일반 농민들과는 다른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가보의 경우 별 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각 가정에서 소장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그 중 일부는 옛날에 사무라이 계급이었다고 허풍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도라에몽]]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존재하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비실이 과거로 간 진구가 도라에몽의 도구를 이용해 전공을 세우는데, 비실이의 조상이 그것을 자신의 전공으로 바꾸어 거짓으로 보고를 올려 우치가타나를 하사받는다. 그 우치가타나는 가보로 대대손손 내려와, 그의 후손 비실이가 자신이 사무라이 가문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뻥카를 치는 용도로 사용된다.] 센고쿠 시대에는 평상시에는 농민이다가 전시에 동원되는 병사들을 아시가루라고 하였는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로 접어들며 하나의 계급화가 되었다. 고쿠다카를 받는 사무라이와 달리 아시가루들은 녹봉을 받았다. 아시가루를 지휘하는 아시가루 코가시라(足軽小頭)가 승진 한계선이었다. 여러 아시가루 코가시라를 거느리는 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將)는 하급 사무라이가 담당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시가루 집안 출신으로 잡병에서 시작해 태정대신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고, 막부말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아시가루 집안 출신.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병력동원 자체가 없어지니 아시가루 계급이 유명무실해졌고, 사무라이들이 관료화되자 아시가루들은 그 아래 포졸이나 소방관 정도의 역할을 맡아 평민으로 동화되었다. *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 - 보통 잡병으로 번역한다. 무가사회의 구성원이긴 하나 무사는 아닌 신분이다. 사무라이에 딸린 하인 와카토(若党)[* 주인 신변의 잡무와 경호를 담당한다. 하인이 아니라 사무라이 견습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투에도 참가하고 평시에는 잡일을 하는 츄겐(中間), 무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하인 코자(小者) 등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