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명백한 오류들 === 기전체 사서이기 때문의 개인의 공은 강조하고 과는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 오서, 위서, 촉서끼리 같은 사건을 다른 년도로 기술한 경우가 많다. * 무제기에서는 손권이 유비를 돕기 위해 합비를 공격하고 그 후에 조조가 물러났다고(무제기에는 적벽 전투 자체가 생략되어 조조가 그냥 물러난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오주전에서는 먼저 주유가 조조를 격파하고 그 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나온다. * 공손찬전에선 장순, 장거와 삼군오환의 난 때 공손찬이 5, 6년이나 오환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고 쓰고 있지만, 후한서에 따르면 이 당시 삼군오환의 침공은 2년 만에 평정된 전쟁이었다. * 공손찬전에선 유우가 유주에 오기 전에 속국오환의 탐지왕이 종족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항복한 후 기도위에서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에 올랐다고 나오나 후한서에는 유우가 온 후 공손찬이 기도위에서 항로교위, 도정후가 되었다고 나오고 자치통감도 공손찬이 유우가 오기 전에는 기도위로 기록하고 유우가 부임하고 나서 공손찬이 중랑장이 아니라 항로교위였다고 기록한다. *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동탁 토벌에 종군하고 적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 달아났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지 공손찬전 기준으로 당시 공손찬은 분무장군이고, 후한서 공손찬전 기준으로도 항로교위라 관직이 맞지 않는다. * 선주전에서는 여포의 뒤통수로 유비가 서주를 빼앗길 때 소패로 가면서 관우에게 서주의 치소인 하비를 맡긴다는 오류가 나온다. * 상랑전에는 상랑이 승상장사의 직책을 떠난 이후부터 한가하게 노닐며 하는 일 없이 30년을 보냈다는데 배송지는 제갈량한테 면직당한 게 228년이고 그가 졸한 게 247년인데 30여 년이 말이 되느냐고 이 기록이 잘못이라고 깠다. 또 장황후전을 보면 238년경에 상랑이 지절로서 장황후에게 옥새(玉璽)와 인수(印綬)를 주고 황태자 유선에게는 인수를 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때 상랑의 직책은 행승상사(行丞相事, 승상 직무대행) 좌장군(左將軍)이었다. 명예직일 가능성은 높지만 하는 일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 고귀향공기에서는 사마씨의 주홍글씨인 고귀향공 시해사건을 빼고는 그냥 조모가 죽었다고만 썼다. 진태전에서도 진태가 사마소에게 조모를 시해한 것을 책임지라고 한 부분이 생략되었다. 이 부분은 배송지가 한진춘추, 위씨춘추, 간보진기 등 다른 사서를 통해 보충하여 진상을 기록했다. * 여포전에서 여포가 동탁 살해 후 60일 후에 패했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영웅기를 인용해 동탁 사망이 4월 23일이고 장안성 함락과 여포 패주가 6월 1일로 윤월이 없었다고 하니 60일은 되지 않는다고 본전을 비판했다. 후한서 효헌제기의 기술도 영웅기와 같다. * 하후돈전에서 하후돈이 대장군이 되기 한참전에 일어난 하후돈 인질사건 중 한호는 하후돈을 대장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지집해에서는 하후돈전에서 이후 한호가 '어찌 일개 장군 때문에 너희를 풀어 주겠느냐?'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대'자가 잘못 들어간 글자라고 본다, 혹은 그냥 대장이 잘못 쓰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 하후돈전에서 '태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하후돈을 대장군의 후군으로 삼았다'라고 쓰고있는데 이 당시 대장군은 공석이고 조조는 사공이다. * 하후돈전에서 '건안 24년 태조의 군이 여포의 군을 마피에서 격파했다'고 쓰고있다. 이때는 이미 여포가 죽은 지 20년 후다. *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후대에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 것이라 적어야 한다. * 선주전에는 한중 공방전 당시 하후연군을 대파하며, 하후연, 장합과 조조가 대행하게 한 익주자사 조옹 등을 벴다고 나오는데 장합은 후일 제갈량에게 죽으니 오류다. 삼국지집해에 실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장합 부분은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 * 선주전에는 유비의 황제 즉위를 권하는 데 권학종사 [[초주]]가 참가했다고 되어 있으나 초주전에서는 초주가 권학종사가 된 것은 유비가 죽은 건흥 연간에 [[제갈량]]이 명한 것이며 초주의 나이를 상고하면 당시에는 겨우 20대 초반이라 이런 중대사항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인데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