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지명/서주 (문단 편집) == 개요 == 기원전 107년에 처음 자사를 설치할 때, 이 방면을 맡는 자사의 감찰 구역이 원래 [[타이산|태산(泰山)]]과 회수(淮水) 사이의 동부 해안 지방을 가리키던 지방 이름인 [[서주(중국)|서주(徐州)]]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서주자사부가 되었다. 주로 현재의 [[장쑤성]] 북부와 [[산둥성]]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군웅할거 시기에는 당시 서주자사 [[도겸(삼국지)|도겸]]이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보하여 사실상 도겸의 영역이 되었고 이후 서주목에 임명되었다. 이후 도겸의 후계자가 된 [[유비]]가 그 세력을 물려받았다. 그 뒤에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겼다가, 결국 여포를 멸망시킨 조조가 서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비가 잠시 복귀했으나 조조에게 패주한 뒤론 영영 서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유수구 전투]] 이후인 213년 무렵 조조는 [[손권]]과의 대치가 장기화할 거로 생각하고 회수(淮水) 이남의 주민들을 회수 이북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장강을 건너 이주해 버려(...) 무려 10만 호(戶)가 손권에게 유출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기록의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 일로 인해 하비군과 광릉군 남부 일대는 사실상 폐현(廢縣)되어 무인지대가 형성되었다. 훗날 [[손준]]이 255년에 장강을 건너와 광릉군의 일부 현을 점거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소득이라 할만한 일이 되진 못했다. *'''치소'''(治所)[* 193년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면서 무고한 백성들까지 [[서주 대학살|학살]]하면서 피해가 막심했고, 특히 당시에 자사의 치소인 담현까지 함락당한 일도 있었기에, 도겸이 하비현으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가 서주목을 물려받은 194년 시점에는 확실하게 하비가 서주목의 치소로 언급된다. 이후 위나라 때 서주자사의 치소는 팽성국 팽성현에 있었는데, 아마도 유수구 전투 이후 주민들을 이주시킨 시점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후한]동해군 담현→[193?]하비국 하비현→[213?]팽성국 팽성현 *198년?: 낭야군·태산군을 분할해 동관군 설치. 동해군·낭야군을 분할해 이성군 설치. 동해군을 분할해 창려군 설치. *206년: 창려군을 폐지하여 동해군에 합병함. *225년: 이성군을 폐지하여 동해군에 합병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