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성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s6A0hkg11U)]}}}||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삼성상회.jpg|width=100%]]}}} || || {{{#fff '''주식회사 삼성상회'''}}} ||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8년 3월, 협동정미소 주인이었던 [[이병철]]이 [[대구광역시|대구부]] 수동(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인교동)에[* 현재는 일대에 '크레텍책임'이라는 [[기계]][[공구]] 및 산업용품 사업장이 있다. 옛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고 대신 그 자리에는 높이 5.95m, 너비 8.7m의 삼성상회 재현 [[벽]]과 삼성상회 실물을 250분의 1로 축소한 청동 모형으로 구성된 작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리고 [[북구(대구)|북구]] [[침산동(대구)|침산동]] 옛 [[제일모직]] 자리에 들어선 [[대구삼성창조캠퍼스]]에 삼성상회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그 외 이병철이 당시에 살았던 [[집]]은 현재 [[북성로(대구)|북성로]] [[오토바이]] [[골목]]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0010107325450306|관련 기사]].] '[[삼성상회]](三星商會)'를 개업한 게 본 그룹의 시초이다. 당시 29세의 이병철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농지 투기에 실패한 후 심기일전을 굳히며 자본금 3만 원[* 2010년 기준으로 약 3억원 상당. [[부농]]이었던 부친이 사업 자금을 대줬다고 한다.]으로 삼성상회를 세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는 물론이고 그 전 세기부터 굴지의 대기업이던 일본의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사와 비슷하게 들리려고 이름을 지었다는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삼성을 일본어식로 [[훈독]]해 읽으면 "[[ミツボシ☆☆★|미쓰보시]]"로 읽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농산물]] 판매와 '별표[[국수]]' 판매 등 가볍고 기본적인 것을 판매했다. 훗날의 삼성그룹 형태와 비교하면 차이가 현격히 나는 편이다. 심지어 [[설탕]]과 [[비료]] 팔던 시절 전의 얘기다. [[CJ그룹]] 전 명예회장이자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삼성상회는 지금의 삼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국수 공장이 매출은 늘었지만 정작 이병철 본인은 그 돈을 모두 공장 설비 투자에 쏟았고 이병철 일가 역시 공장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을 정도로 공장 상태가 열악했다고 한다.[* 사족으로, 이맹희 왈 이때 건너편 마을의 사실상 빈민촌 비슷한 곳에 [[전두환]] 일가가 살았다고 한다. 이때 전씨 일가가 삼성상회에 일하러 오기도 했다고.] 그래도 별표 국수가 많이 팔려 매출은 올라갔지만 [[대구광역시|대구]][* 1981년 6월 30일까지 대구는 [[경상북도]]였다.]에는 경북에서 1위를 차지하는 소표 국수가 있었고, 2위의 풍국산업도 있었다.[* 여담으로 풍국산업은 이후 석유파동 시기에 제면 사업을 매각하고 영락하고 매각되었다. 하지만 풍국면은 지금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만평네거리 북쪽 근처에 공장이 있으며, 현재는 [[범 삼성가]]인 [[신세계그룹]]의 국수 [[OEM]] 회사다.] 결국 별표 국수는 이들의 아성과 도전을 이기지 못해 [[폐업]]했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후 1948년 서울 종로2가에서 [[조홍제]]와 함께 삼성물산공사로 재출범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임시 수도였던 부산으로 피난간 후 [[삼성물산]]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전쟁 이후 국가를 지불보증인으로 세워 차관을 받아오면서 [[정경유착]]을 통해 점차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53년 [[제일제당]]을 세워 처음으로 제조업을 시작해 국산 설탕을 개발했고, 1954년 [[제일모직]]을 세워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개발해냈다. 1957년에 한국 재계 사상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 채용을 개시한 후 1958년 [[안국화재]]와 [[한일은행|한국흥업은행]]을 인수해[* 그러나 [[한일은행]](한국흥업은행)은 1961년 군부정권에 헌납하였다.] [[금융]]업에도 처음 진출하고 이듬해에 한국 재벌 중 최초로 [[비서]]실을 설치해 기업집단으로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1963년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및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을 세트로 인수했다.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해 언론사업에도 진출하고 신문용지 자체 수급을 위해 [[한솔제지|새한제지]]도 인수했다. 이렇게 순조롭게 확장하며 삼성은 50~60년대에 재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_yh7iZkI3EA)]}}}||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반강제로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으나, 1968년쯤 경영 일선에서 복귀한 후[* 정확한 시기에 대해선 이병철과 이맹희의 말이 엇갈리는 편이다. 최대치로 잡으면 1973년에 복귀한 것이니 그동안은 공동 경영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하여 수원 공단부지를 매입했고, 이듬해 [[삼성전자]] 및 [[삼성전기|삼성-SANYO전기]]를 세웠다. 이후 1970년 [[삼성SDI|삼성NEC]]를 세워 전자사업 확장을 개시하며 1973년 [[제일합섬]], [[호텔신라|임피어리얼]], 1974년 [[삼성석유화학]] 등을 세우며 화학이나 관광분야 등에도 영역을 확장했고, 같은 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산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J5451c7BtQ)]}}}|| 1976년 본사를 태평로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1977년 [[삼성종합건설]]을 세워 건설업에도 손을 뻗고 1979년에 삼남 이건희가 부회장이 되면서 2세 경영체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80년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한 후 1982년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즈]]를 창단하며 종합연수원을 열었고, 1983년 한국 최초로 64K D램 개발에도 주도했다.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을 세워 전산사업에도 진출했고 1987년에 [[삼성종합기술원]]도 세웠다. 그해 11월 이병철이 사망하자 [[이건희]]가 가업을 이어받아 12월부터 회장이 됐고, 1990년대부터 친족분리를 진행해 1991년 [[신세계그룹|신세계백화점]]과 [[한솔그룹|전주제지]], 1993년 [[CJ그룹|제일제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5dsvm9ObHA8)]}}}|| 1993년 이른바 '신경영 선언'에 따라 로고와 기업 이념 등을 바꾸고 1995년 한국 대기업으로는 최초로 소그룹 제도를 도입했으며, 동년에 [[삼성자동차]]를 세워 자동차 산업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구조조정을 거듭 단행해 2000년에 삼성자동차를 프랑스의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매각했다. 1990~2000년대 [[반도체]]와 [[TV]], 2010년대 [[스마트폰]] 시장 등에서 급성장을 거듭하며 국내 대기업 수준에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변신]]하는 것에 성공한다. 2001년에는 왕자의 난으로 공중분해된 [[현대그룹]]을 제치고 다시 [[재계서열]] 1위로 다시 올라섰고, 2020년대까지 1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에는 서초 [[삼성타운]]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2014년 5월 이건희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아들 이재용이 사실상 지휘봉을 잡아 동년도에 [[삼성종합화학]] 등 4개 석유화학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했고, 2015년 (신)[[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역합병해 '통합 삼성물산'을 출범시켰다. 2016년 [[삼성정밀화학]]과 [[삼성SDI]] 케미컬사업부문을 [[롯데그룹]]에 팔고 2017년 2월 미래전략실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계열사별 독립/자율경영체제 전환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본사를 삼성타운에서 [[삼성디지털시티]]로 이전했으며,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도 문을 닫았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70403_0014805204&cID=10402&pID=13000|기사]] 라고 공식적으로만 말했을뿐 사실상 미래전략실이라는 명패만 땐거지 현재 삼성그룹의 중추인 삼성전자에서 계열사 경영관리[* 대표적으로 계열사별 한해 실적 집계하여 계열사별 고과를 메긴 후 그 고과별로 계열사간 PS, PI같은 보너스 책정하는 행위]를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다]]. 2017년 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삼성그룹은 그룹의 경영을 총괄하던 미래전략실의 해체 계획을 발표했다. 미래전략실은 삼성의 계열사(관계사)들을 수직적 지배하는 조직으로서, 미래전략실의 해체는 삼성그룹의 해체를 의미한다. 한편 삼성그룹은 미래전략실 해체 후엔 계열사들이 각자 자율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룹 공채도 2017년을 끝으로 없어지고, 계열사별로 독자적으로 채용하는 체제로 바뀐다고 하였다. [[http://www.sedaily.com/NewsView/1OD77G5VK7|기사]] 결국 2017년 4월 3일에는 삼성그룹 공식 홈페이지와 블로그가 문을 닫았다. 이보다 앞선 2017년 3월 2일에는 그룹 사내 방송이 종료되었고, 3월 3일에는 그룹 기자실이 폐쇄됐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3&aid=0003259371|기사]] 다만, 삼성 관계사간의 지분관계는 여전하기 때문에 그룹이 해체된 것은 아니다. 삼성은 여전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하는 [[기업집단]]이며, 그룹 총수 [[이재용]]이 실질 지배력을 행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