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부전선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estern_front_1915-16.jpg|width=500]] 흔히 제1차 세계 대전 하면 떠올리는 '''[[참호전]]'''의 참상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서부전선이다. 의외로 참호전은 서부전선, 그리고 어쩌면 [[이탈리아 전선]]의 예외적인 상황에 가까운데, 서부전선과 달리 [[세르비아 침공]] 및 [[동부전선]]은 [[기동전]]과 [[회전]]이 주된 양상이었다. 후자의 경우 [[독일 제국]]을 제외한 주요 참전국들[*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왕국]]]이 상대적으로 [[후진국]]이고, 전선이 넓은 동유럽 평원에 위치하며 그 길이는 서부전선보다 훨씬 긴 데 반해 배치된 병력은 상대적으로 적어서 병력 밀도가 낮아 전선 돌파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즉 동부전선은 [[회전]]이 더 자주 벌어질 수 있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참호전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 [[독일 제국]] 셋 다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인데다 [[슐리펜 계획]]마저 [[마른 전투]]에서 저지당하여 독일의 신속한 승리가 날아갔다. 게다가 동부전선과 달리 전선의 병력 밀도가 매우 높아서 전선 돌파나 기습을 하기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양측이 참호를 파고 기나긴 대치 상태에 돌입하면서 끔찍한 인외마경의 [[진흙]]탕 바닥의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선의 경우 서부 전선에 비해 병력 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전선이 형성된 곳이 그 악명높은 [[알프스 산맥]]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참호전이 벌어지게 된다.] 참호전은 [[기관총|화력 팩터]]가 [[기병|기동 팩터]]를 상대로 우위를 누리면서 일어난 전투양상이었다. 즉 후술할 전차나 비행기와 같은 참호를 돌파할 만한 무기와 그 무기를 사용할 전술의 부재가 빚은 전투양상이었던 것이다. [[솜 전투]]마냥 적군 참호에 보병대를 [[어택땅]]시켜 들이부으면 기관총 앞에서 벌집이 되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도 우수수 죽어나갔다. 왜냐하면 이 장교들이 결국 병사들을 독려하고 앞장서서 이끌어야 했으니까. 통계에 따르면 일반 사병의 사망률은 1/8 정도였지만, 귀족 장교들은 1/5 가량이 사망하였다.], 결국 영국-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술은 모두 '''참호 파고 버티기'''으로 일종의 [[수렴진화]]를 겪었다. 특히 연합군의 참호는 [[독일군]]에 비해 [[연합군]]의 [[참호]]가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었고 심지어 [[익사]]할 정도로 물이 차 오르기도 했다. 위생 상태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독일군이라고 나을 것도 없어서, 독일군은 본토에서 멀리 진격 나와 있는 상태인 데다 [[경제]]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아서 [[보급]]이 후달린 나머지 병사들이 그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닥을 치는 사기 앞에서 목숨 걸고 무의미한 희생을 내가며 연합군 참호를 뒤져 식량을 보이는 대로 싹싹 긁어 털어와야 했을 정도. 결국 양 진영이 [[총력전|국력을 참호선 요새에다 다 퍼붓는 이 막장스럽고 부조리의 끝을 보여준 미친 상황]]은 [[전차]]와 [[비행기]] 등의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등장, 그리고 [[미국]]의 참전으로 기존의 병력소모를 낸 영프연합군이 압도적인 병력, 인력자원과 사기를 보유한 미군에게 주도권을 주면서 충분한 병력의 양과 질을 보유하게 된 연합군이 우위에 서게 되면서 종결되었다. 후술하는 [[제2차 세계 대전]]과는 달리 전쟁의 종결은 서부전선에서 결정되었다. 다른 전선에서도 [[갈리폴리 전투|활발한 전투]]가 벌어졌고, 동부전선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인해 전선 자체가 독일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결국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최후 [[공세]]가 실패하면서 독일의 패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는 [[독일 제국|독일]]의 국력의 3분의 2 수준이었는데, 인구수는 [[저출산]]으로 정체되었고 철광과 탄전이 부족하여 대규모의 [[공업]]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업]]과 [[식민지]], 금융업과 사치품 산업으로 막대한 자금을 보유했지만 독일은 프랑스보다 산업이 발전되어 있었고 프랑스의 식민지를 뺀 본국은 인구 수에서 독일에 밀렸다(독일: 6,500만 / 프랑스: 3,980만). 또한 프랑스는 전쟁 초기 [[국경 전투]]의 패배로 북부의 곡창 지대를 죄다 독일에 빼앗기고, 수도인 파리에서 불과 50여km까지 밀리면서, [[수도(행정구역)|수도]]의 함락을 앞두기도 했다. 그러나 [[마른 전투#s-2|제1차 마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반격하기 시작하더니, 1917년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군]] 병력이 기진맥진하며 병력소모가 극심한 영프연합군의 바톤을 이어받아 [[생 미이엘 공세]]를 시작으로 뫼즈-아르곤 공세를 거치며 지친 독일군을 압박해 [[버틸 수가 없다!|버티지 못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킬 군항의 반란]]으로 인해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프랑스는 승리했다. [[1940년]]과 달리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을 되갚아 줘야 한다는 이유(그리고 패전하면 프랑스가 사라질테니)로 사기가 높았으며 식민지 경험을 통해 실전경험 및 훈련도도 매우 높았으며, 인재 면에서도 역대 프랑스군 중 가장 우수했었다. [[페르디낭 포슈|포슈]], [[조제프 조프르|조프르]], [[필리프 페탱|페탱]] 모두 이 시기 크게 활약한 장군들이며 프랑스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고 독일에 반격을 가해 전선을 고착화하는 데 성공하며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물론 이를 위해 군인/민간인 합쳐서 180만 명, 전체 인구의 4% 넘게 갈려나간 건 둘째 치고(...)[* 말이 4%지 대부분이 청년층이라 그 피해는 훨씬 더 컸으며, 이 악영향은 전간기 때 히틀러의 위험한 불장난에 소극적으로 대처함과 동시에 마지노선에 매달리게 되는 그릇된 배경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