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하 (문단 편집) === 혼란기 === 하지만 서하는 곧 혼란을 겪는다. 정작 경종은 말년에 태자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를 취하는 바람에 1048년, 태자의 원한을 사 태자에게 암살당하고 그 태자도 처형된 탓에 막내아들인 [[의종(서하)|이양조(의종)]]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문제는 의종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그 모친인 몰장태후가 친인척들을 등용해 정사를 어지럽히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 1056년, 외간 남자와 사통하다가 또 다른 사통하던 사람에게 원한을 사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녀의 오빠인 몰장와방이 혼란을 수습하여 몰장씨 일가의 전횡은 이어진다. 하지만 몰장와방도 1061년, 의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끝내 역으로 살해된다. 그렇게 하여 외척의 영향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1068년에 개혁정책을 펼치던 의종이 전쟁 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급사한다. 결국 또다시 어린 황제인 [[혜종(서하)|이병상(혜종)]]이 즉위하고 이번에는 태후 양씨가 섭정하고 또다시 외척 시기가 열리며 이 와중에 혜종은 한번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다. 게다가 혜종 역시도 의종 못지않게 단명한다. 이 시기에는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공해 북송이 접경 무역을 중단하거나, [[충악]]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데 이어 북송 조정의 승인도 없이 수주성을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보안군이 많은 피해를 입고 1071년 충악이 나올성을 축조하였으나, 북송의 축성에 분노한 서하에 의해 무녕성을 빼앗기는 등 서하와 북송 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다. 1073년 왕소가 하황 일대를 수복한 뒤, 1081년 이병상이 양태후에 의해 억류되자 이를 이용해 북송이 [[오로벌하| 5개의 진로로 서하를 공격하였으나]]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난주를 수복했던[*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바뀜] [[이헌(북송)|이헌]]의 군대가 영주에 오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군량 보급 문제로 인해[* 서하의 양태후가 [[청야전술]]을 통해 군량 보급을 끊어 놓았다.] 실패했다. 이후에는 북송이 1082년 [[서희(북송)|서희]], [[심괄]]로 하여금 영락성을 신축하여[*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영락성 신축을 반대했으나 신종은 이를 강행하였다. 이로 인해 원한을 품은 충악은 영락성이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 서하군이 영락성을 공격할 즈음 충악은 이 와중 죽고 만다.] 서하를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서하의 역공을 받아[* 서하군은 이헌, [[심괄]]의 원군이 영락성을 돕는 걸 막았다.] 성이 함락되고 서희도 난전 중 전사했고 송 신종은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였으나 서하도 경제적인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