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교사 (문단 편집) == 한국에서 == [[한국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베이징]]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 불리는 [[7성사|성사]] 집전을 했는데, 이는 서적을 통한 신앙의 수용과 실천과정에서 잘못 이해한 결과였다. 곧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성사 집행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청나라]] 베이징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즉시 성사 집행의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게 되였다.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de Giuvea, 揚士選)는 약속대로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801년의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에 대한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으며, [[교황]]에게도 1811년[* [[비오 7세]]]과 1825년경[* [[레오 12세]]] 2차례의 서한을 보냈다.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이러한 노력에 [[교황청]]에서는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베이징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여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을 보장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베이징교구로부터 조선교구의 독립이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1886년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이 보장되어, 개항지를 중심으로 본당이 설정되고 [[한국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도회]]]가, 1909년에는 [[베네딕토회]][* 한국 천주교 최초의 남자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선교를 했고,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조선 후기에 들어왔으며, 특히 한국의 계몽과 서양 문화 도입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는 의사[* 그의 아내는 왕실의 어의였다.]이자 교육자이자 통역가이며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 제중원-광혜원은 알렌이 주도한 것임.] 아펜젤러 선교사 역시 [[배재학당]]을 세운 인물로,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민족 정체성을 세우고 독립에 큰 기여를 한 위인들을 양성한 곳이다.[* 아펜젤러와 [[이승만]]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직접적인 [[독립운동]] 기여보다는 그들의 활동을 후원했다고 할 수 있다.]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 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을 설립했다. [[헨리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가 유창했다.]는 이화학당의 제6대 교장을 맡아,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여 정동에서 신촌으로 이전하는 등 한국 여성교육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헌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점과 '''[[종교인]]'''이란 점 때문에 업적에 비해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다. 2010년대에 와서 개신교에서 [[미국]]과 [[브라질]] 다음으로 선교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다름아닌 [[대한민국]]이다.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2007년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겪어서인지 웬만하면 강성 [[이슬람권]] 국가로는 선교를 보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밖에 아프리카, 남미로 보내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면 몰라도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나라가 수두룩하다. 미국, 호주나 뉴질랜드 같이 기독교 역사가 길고 잘사는 나라에도 수많은 한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다. 최근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가 커져가고 있는데, 내외부의 사건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다. 특히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이후에는 개신교 선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만, 법적으로 타종교 극단주의 성향이 극심한 인권탄압국에까지 신분을 속이고 선교하는 통에 선교사 살해나 납치 등 여러 종교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터키[* 터키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거리에서 알라천국 불신지옥하면 잡혀간다. 터키에서는 종교는 종교사무국(diyanet)의 허가를 받아야하며 수니파 이슬람은 아예 국가가 관리한다. 한인 선교사들은 종교사무국의 승인을 받지않고 보통 관광비자로 와서 선교해서 추방당한 경우가 많다.]나 이란이나 여러 이슬람 지역에서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적발되어 추방당하고, 덩달아 종교와 상관 없는 한국인까지도 추방당하는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한국에 대한 혐오까지 커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시궁창]] 인권탄압과 만연한 [[크리스티아노포비아]]의 탓(주로 [[이슬람 극단주의]])이지만, 위험지역이나 우범지대에 들어가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책임도 부정할 수 없기에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문제는 이걸 비판이나 수정으로 막기 어렵다는 점. 종교의 자유 원칙 때문에 선교를 강제로 막을 수는 없다. 한국인 [[승려]]가 [[아프리카]]에서 [[절(불교)|절]]을 차리고 지낸다든지 그 아프가니스탄에 승려들이 가서 자원봉사를 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현지인과 갈등을 빚을 일을 최대한 피하면서 일하기에 언론으로 알려지지 못하지만 대신 말썽거리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비구니]] 2명이 탈레반 지역으로 목숨걸고 의료봉사하러 가려다가, 한국 평화유지군 측이나 [[불교]] 승단에서도 "현지인들과 갈등이 더 커진다"고 만류해서 스스로 그만둔 일처럼[* 유엔군 평화유지군 소속이던 채수문 중령 증언했다.] 이들은 적어도 현지인과 갈등을 알아서 피하기 때문이다. 한편, [[코로나 19]]가 유행 중인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회 선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여러 건 발생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개신교인들이 상습적으로 거짓 진술을 하고, 방역 수칙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개신교 자체의 위상이 떨어지는 와중에 [[숭의교회]] 부목사[*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신자들을 담당하는 목사라고 한다.] 부부가 방역택시를 이용하지 않고도 "방역택시를 이용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오미크론 변이]]를 집단전파하는 바람에, 선교사에 대한 인식은 내핵까지 떨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