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시기 ===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더 [[서인]]과 [[동인(조선)|동인]] 사이에서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시 [[전라좌수영|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격렬한 반대로 [[조선 수군|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 전투|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2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좌수영|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하다.]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 신립이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전략과 당시 조선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조총]]의 위력을 전혀 무시한 채로 과거의 [[니탕개의 난|경우]]처럼 평지에서 싸울 수 있다고 오만했다. 그리하여 신립은 오만한 자신감에 고무되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지금의 문경새재)을 버리고 사방 뻥뚫려 있는 [[충청북도|충청도]] [[충주시|충주]] [[탄금대 전투|탄금대 평야지대]]에서 기마 전술로 펼치다가 왜군의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의한 [[조총]] 전술로 거의 전멸당한다. 그러고 탄금대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로 인해 참패.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군|영변부]]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分朝)'''를 [[책임회피|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4029_003|"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4030_001|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4030_003|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해주시|해주목]], [[개성시|개성부]]와 [[평양부]]를 거쳐 [[의주부|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고려)|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린다면 관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것이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도 와해될 공산이 크다. 물론 왕이 잡히면 패전은 기정사일이지만 문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고자 했다는 것.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는데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평양을 지난 후에 영변에서는 선조가 대놓고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명에 망명한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은 조선군을 지휘하는 선조가 타국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 명나라 입장으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수차례 자신들은 명을 치는 길을 빌려주고 지원하라고 압박을 해왔었다. 수나라, 당나라, 거란, 여진, 몽골의 외침에 맞서 선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조선에 대해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에 경계해왔다. 이러니 강군의 조선이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명나라는 당연히 믿지 않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근데 이전 왕조인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지기 전 [[관구검]]이 이끄는 고작 1만병력에게 수도까지 털린 적이 있고, [[고려]] 역시 [[카다안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여요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잃어버린 상태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느냐?"는 식으로 디스 당한 적이 있으며, [[조선]] 당시 [[명나라]] 또한 [[영락제]]이후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가정제]],[[만력제]]등 막장황제들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본인들 역시 만만히 보던 왜구에게 남부지역을 유린당한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인 의심이 아닌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명나라 조정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압록강]]의 배를 [[만주|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 거기에다 신하들의 눈물 머금은 반대[* 이때만큼은 [[동인(조선)|동인]]이든 [[서인]]이든 간에 모두 한목소리로 '요동으로 가면 안 된다'며 명을 거두어 달라고 흰 소복차림으로 머리 풀고 정말로 결사 반대했다.]에 결국 [[의주부|의주목]]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일단락되듯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군|영변대도호부]]에서 [[조선/왕사|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 이때 정철과 류성룡은 심지어 진지하게 선조에게 명나라로 도망갈 거면 선위하라며 하야요구를 하려하였는데 이 둘다 선조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선조에게 별 말 못하고 '신들이 못나서 나라가 이꼴입니다.'라고 사죄하고 도망치며 조선 역사상 최초의 신하에 의한 하야요구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거기에 파천 이후 분노한 백성들이 [[한성부|한양]]에 쳐들어가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방화되어 손실되었다.[* 노비 문서가 있고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왜군의 [[한성부|한양]] 입성 후 [[경복궁]]을 묘사한 듯한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때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 외에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숭례문|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변절(순왜)을 이유로 모조리 [[끔살|죽임]]을 당했다.] 이쯤 되면 당시 [[조선 왕실|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질의 달인인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의병|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변방의 장수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 [[임진왜란|임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편집증|의심병]]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과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전쟁이 한참인 시기임에도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점이다.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숙청하지 않았고 한신이나 [[게오르기 주코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 중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발한 원균의 무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선조의 큰 실책이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 이 부분은 선조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하였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 사실 이건 선조만의 잘못은 아닌데 원균이 자기합리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 선조는 물론이고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흉이 선조이다. 막바지에야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출진하지 않으려 버티던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조 입장에서는 빡칠만 했다. 애초에 [[원균]]이 먼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부산]]에 있는 [[왜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근자감 넘치는 장계를 올렸다. 막상 그렇게 통제사가 되고 한다는 소리가 '왜군의 수가 엄청 많아서 전투를 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 육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등이니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