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경/번역 (문단 편집) === [[한국어]] 번역 ===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경로와 마찬가지로 [[성경]] 역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 받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인 경교(景敎)였다. 이들은 [[당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주요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는데, [[마태오 복음서]] 6장이 ‘세존보시론’(世尊布施論)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문이 [[신라]]나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 1271년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요한 몬테 코르비노가 신약성서와 시편을 [[몽골어]]로 번역했으나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파일:external/www.catholicnews.co.kr/268_494_3742.jpg]] 실제로 [[조선]]에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 문헌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명나라]]에 들어와 저술한 한역 서학서들이었으며, 1822년에 [[중국어]] 완역 성서가 번역될 때까지, 주로 참고한 것은 [[라틴어]] 성서를 한문으로 발췌 번역한 <성경직해>(聖經直解, 1642)와 <성경광익>(聖經廣益, 1866)이었다. 이 책들은 해당 주일이나 축일에 읽힐 성서들을 발췌하여 실어놓은 묵상이나 행동지침을 담은 해설서였다. [[천주교]]에서는 [[전례력|각 주일과 주일 이외의 첨례 곧 축일(성탄 축일 등)]]에는 그 주제에 따라 성서 구절을 골라서 읽도록 되어 있다. 그리하여 1년의 52개 주일과 그 밖의 34개 축일에 읽게 되는 성서 내용은 각기 다르게 정해져 있다. 이 책들에선 이렇게 각 주일과 축일에 읽는 각기 다른 성서 내용을 한 항목으로 묶어서 펴냈다. 조선에 전래된 이 책들은 곧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는데, <한국 천주교회사>를 쓴 달레 [[신부(종교)|신부]]에 따르면, 이 한문본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역관 출신의 최창현이었다. 그는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필요한 부분만 번역 재구성하여 <셩경직해광익>을 펴냈다. 여기에 포함된 성서는 4[[복음서]]의 30.68%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이 책은 박해기 중에도 계속 보급되었는데, <성경 말구 누가> <성경 마두> <성경 요안> <성경 슈난> 등 4복음서 별로, 또는 수난 구절만 모은 성서로 분리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비록 일부이지만 <셩경직해강익>은 평민의 문자인 순 [[한글]]로 옮겨진 첫 성서 본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1890년 초에 필사되어 유포된 <고경>(古經)과 <고성경>(古聖經)은 일종의 교리문답서로서 [[창세기]]의 일부 내용이 발췌 번역되어 있어서 구약성서의 첫 소개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병인박해]] 이후 한미조약과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어 어느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활력을 되찾고 성서 번역도 활발해지는데, [[개신교]]에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와 <성경젼서> 등이 그것이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성경직해>를 대량보급하기 위해 1892~97년까지 활판본으로 9권을 펴냈다. 더불어 1906년에 한글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손성재 야고보 신부가 [[마태오 복음서]]를, 한기근 바오로 신부가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를 역주하고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뮈텔]][*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주교가 감준한 4복음서 번역본인 <사사성경 四史聖經>을 1910년 발간하였다. 이 책이 첫 4복음서 한글 번역본이다. 그후 한기근 신부가 [[사도행전]]을, [[베네딕토회]] 슐라이허 신부가 <신약성서 서간, 묵시편>을 번역하여 완전한 신약성서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이밖에 어린이를 위한 <少年聖書(쇼년셩셔)>를 출간하여, 1960년 <소년성서>라는 이름으로 개정 및 출간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전후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성서를 계속 다듬어가면서 발간 보급하였는데, 선종완[* 성모영보수녀회 창립자이기도 하다.] 신부는 <사사성경 합부 종도행전>에 해제와 주해를 새로 붙여 1948년에 <신약성서 상편>을 개정판으로 내었다. 이걸 나중에 <복음성서>란 이름으로 바꾸고, 이후 <서간 성서>도 펴내었다. 옛 번역판 성경은 아직도 성 비오 10세회와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등 한국의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판매도 하고 있다. 그 후 선교사가 아닌 우리말을 모국어로 쓰는 우리나라 성서학자들이 성서의 원어를 배워 원전을 직접 우리말로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성서 번역에 새 기원이 이루어진다. 선종완 신부는 1955년부터 히브리 원문에서 구약을 옮기기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두 17권을 번역 간행하였는데, 이게 [[한국 가톨릭]]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이어 최민순 신부가 1968년에 라틴어성서 역본에서 옮긴 <시편>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의 운율을 살린 번역문이어서 널리 전례문으로 사용되었다. 1977년에는 이 시편과 유고인 ‘아가서’가 합쳐진 <시편과 아가>가 출판되었고, 최창성 바오로 신부가 간추린 성서인 <구세사>를 펴냈다. 한편 평신도인 김창수가 [[일본어]] 성서와 [[영어]]성경을 번역대본으로 삼고 라틴어성서로 교열하여 신약을 펴냈고, 백민관 테오도로 신부는 1972년에 4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합본 복음서>를 간행했다. 한편 [[한국의 개신교]]에선 [[독일]] [[루터교회]]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가 [[충청도]] 고대도 인근에 상륙하여 20일간 포교를 하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제너럴 셔먼호 전후로[* 셔먼호 사건 전해에 이미 밀입국해서 4달간 선교 활동을 펴고 [[서울]]로 잠입 중에 배가 파손되자 [[청나라]]로 돌아간 후 [[북경]]에서 동지사 일행을 만나 앞서 선교 시 선교조직이 퍼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해 [[미국]] 배 셔먼호를 타고 왔다.] 당시 토머스 저메인 목사가 선교 목적으로 쓰던 서적은 한문성경으로 지하화된 [[한국 가톨릭|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일부 발췌 번역한 걸로 보인다. 개신교의 첫 번역은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이고 신약전서 완역은 1887년 <예수셩교젼셔>이다. 이는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로스의 주도로 1872년부터 한국인 백홍준, 이응찬 등에게 한문성경을 전수하며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한국인]]들은 [[평안도]] [[의주]] 지역의 사람들이라 아무래도 [[서북 방언]]이 많이 섞였다. 때문에 이후 순차적으로 일부 번역이 계속되다가 1900년 <신약젼서>로 신약성서가 완역되었고, 몇 차례 개정을 거처 1906년 개정판 2만부가 발행되었다. 구약성서 완역은 1911년 <구약젼셔>로 역시 2만부가 발간되었다. 1938년 기존의 맞춤법 개정으로 아래아 같은 발음이 사라지고 기존의 우리말보다 원역에 가깝게 개정된 개역판이 발간되었으며 1956년 1961년 각각 맞춤법 개정으로 인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발간되었다. 1961년에 복음동지회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새로 옮긴 신약성서1-마태의 복음서> 등이 나오다가 한국학자로 구성된 대한성서공회의 신약번역위원회가 성서 원어에서 직접 옮겨 1967년에 <신약전서 새번역>을 펴냄으로써 한국인 번역본의 꽃을 피웠다. 이 <신약전서 새번역>은 「개역」이나 「구역」에 익숙한 개신교인들보다는, 성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30세 이하의 청년들을 위한 전도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번역 원칙은 "풀어쓰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번역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의무였으나, 누구나 읽어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초판 머리말에서 보여주듯이 기계적인 축자역과 자유스러운 풀이역 둘 다를 삼가는 태도를 취하였다. 현대 [[한국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문의 지문(地文)이 모두 “합니다”체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노력은 [[교회일치운동]]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공동번역성서>라는 획기적인 성서를 낳게 한다. 1968년에 열린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공동번역 결정에 따라 [[한국]]에서도 그 해에 ‘성서번역공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큰 계획 때문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쪽에서는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구약 번역을 도중에서 중단하였고, 개신교 쪽에서는 <신약전서 새번역>만 출판하고 <구약전서 새번역>은 중단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 계통의 그리스도교회가 사용해오던 1611년의 <제임스왕역>(KJV), 혹은 1901년의 <미국표준역>(ASV), 1946년의 <영어표준개역>(RSV) 등에 대한 개역이나 수정을 보류하였다. 그 후 [[천주교]]와 [[개신교]] 번역위원들의 작업으로 1971년에 세계 최초로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신약성서 개정판과 구약성서를 합본한 <공동번역 성서>를 내놓았다.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직역보다는 내용의 동등성을 강조한 의역 중심으로 젊은 층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또 국내 최초로 '제2경전'을 옮겨 소개하였다. 한국 공동번역성서 영향은 북한에도 미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평양신학원 교수를 맡고 있던 이영태 목사의 주도로 북한식 맞춤법으로 공동번역성서를 수정하여 1983년에 "신약전서"를 1984년에 "구약전서"를 1990년에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국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는 [[천주교]]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개신교]]는 폭넓은 신자 층에게 성서를 전달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양한 번역본을 내어놓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198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가톨릭 구약성서 번역 사업을 성서위원회에 추진하도록 하였다. 임승필 요셉 신부를 성서위원회 총무에 임명하여 1992년 6월 <구약성서 새 번역 1-[[시편]]>을 시작으로 낱권 성서를 출간, 1999년 12월 <구약성서 새 번역 18 - [[마카베오기|마카베오 상하]]>를 끝으로 구약성서의 새 번역을 마쳤다. 이어 2000년 10월 신약성서 번역 위원을 위촉하여 2001년 7월 신약성서 <새 번역 1-[[마태오 복음서]]>를 시작으로 2002년 12월 신약성서 <새 번역 10 - [[요한묵시록]]>을 출간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새 번역을 마쳤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와 성서위원회 새 번역 성서 합본위원회에서 최종 번역문을 확정하여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2005년 9월 20일 새 번역 <성경(구약성경, 신약성경)>을 발행하였다. 주교회의는 이 <성경>을 [[가톨릭]] 공용 성경으로 채택함으로써 2005년 대림 제1주일인 11월 27일부터 <매일미사>에 수록하여 전례에서 사용하고 있다.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공동번역 성서> 대신에 새 번역 <성경>이 가톨릭 공용 성서로 지정됨으로써, 한국 개신교계가 배척하여 천주교도 2005년 자체 번역본 출판으로 공동번역성서를 대체 및 사용중단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