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문화 (문단 편집) == 방송 == [youtube(IeJ8ysXK1hs)] [[1988년]] 당시 [[브레먀]]에서 방송된 일기예보.[* 영상 제목을 보면 "09.06.1988"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1988년 09월 06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988년 06월 09일임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경우 날짜를 (일)-(월)-(년) 순서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소련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때는 1939년이었고,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것은 1950년대 후반 [[니키타 흐루쇼프]] 때였다.[* 통계상으로 보면 TV수상기 대수가 100만대를 돌파한 것은 1957년도이고, TV가 1가구당 1대꼴로 보급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소련 최초의 대량생산TV인 КВН-49가 본격적으로 시판된 것이 1949년도 였지만, 이 당시에는 방송권력이 한정적이라서 대중들에게 파고들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렸기 때문이었다. 국토가 위낙에 넓어 난시청 지역이 많았고, 텔레비전에 대해 중요한 대중매체라고 인식한 시기가 미국에 비해 비교적 늦어 완전히 대중화되기까지는 대략 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소련에서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대도시들과 [[키이우]], [[민스크]], [[알마티]], [[타슈켄트]]를 비롯한 구성국 수도에서는 1960년대 중후반 즈음에는 왠만한 집에서도 TV를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기반시설이 부족했던 북 [[시베리아]]와 우랄 지역, 카라쿰을 비롯한 오지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었어도 전파가 닿지 않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다. 물론 당국에서는 1960년대에 TV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한 뒤로는 인공위성을 통한 [[위성방송]]을 활용하고자 노력했으며, TV보급률 상승도 인공위성을 통한 난시청 지역의 축소와 맞물려있었고, 실질적으로 소련 전역에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인공위성 고리존트가 발사된 뒤였다. 이러한 인공위성이 동유럽 각지와 쿠바에 정주하는 소련인들 대상으로도 전파를 내보냈기 때문에 해당 국가에 사는 인민들이 소련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게 하는 효과도 낳았다. 컬러방송은 1967년에 시작했으며 방송 방식은 프랑스식[* 원래 소련에서도 자체 컬러방송 전송방식을 개발하려고 했으나 개발작업 및 수상기 양산에 난관이 일자 포기했다.] [[SECAM]]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컬러 텔레비전은 흑백 텔레비전보다 가격이 많이 비쌌고[* 처음에는 컬러TV 1대 가격이 1000루블을 초과했다. 못 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왠만한 소련 가정의 8달치 급여에 맞먹는 수치였고 기존 흑백TV 가격의 3배에 달했기 때문에 쉽사리 엄두가 안 나는 가격이었다.], 기존의 흑백TV 생산공장들이 컬러TV 생산공장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늦었고, 또한 기존의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방송의 시작과 함께 가격대가 많이 낮아지면서 컬러 텔레비전은 여유가 있는 가정부터 서서히 보급되었다. 이후 컬러TV의 가격이 조금씩 낮아지면서[* 물론 점차적으로 낮아졌다고는 해도 이전부다 부담이 덜한 수준이고 절대적으로 보면 600~750루블대로 싼 값도 아니었다.] 점차적으로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으로 교체되었고, 1970년대 말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다.[* 원래 미국과 일본도 이런 식으로 컬러TV가 보급되었다. 미국에서 컬러방송을 1954년에 시작했음에도 컬러수상기가 흑백수상기 수를 추월한 것은 1972년도였고, 일본도 1960년데 컬러방송을 시작했음에도 컬러 수상기가 흑백 수상기 대수를 추월한 것은 1973년도의 일이었다. 초창기에 컬러 수상기의 가격이 흑백 수상기보다 비쌌고, 송출 지역도 한정적이라서 사람들이 굳이 비싼 돈 들여 컬러TV를 사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요방송국으로 소련의 방송을 총괄했던 소련 중앙텔레비전과 각 지역별로 있던 지역방송국이 있었으며, 현재의 구소련권 국영 및 공영방송사들도 이러한 지역 방송사들이 모태가 된다. 소련 중앙텔레비전의 채널은 소련 해체직전에 6개가 있었고, 프로그램 1과 프로그램 2는 전국종합채널, 프로그램 3(모스크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5(레닌그라드 프로그램)는 지역종합채널이었으며, 나머지는 교육방송이나 스포츠 방송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전문방송채널이었다. 이중에서 전문방송채널은 각 지역별로 안보내는 경우도 많았고, 러시아를 제외한 공화국에서는 자국어 텔레비전 채널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 전역에서 6개 TV채널을 다 볼수있게 된것은 위성방송 체계가 완비된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부터였고, 그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프로그램 1, 프로그램 2와 지역채널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중앙텔레비전 1프로그램은 소련 해체후에 [[러시아 채널1]]이 되었고, 2프로그램은 [[로시야 1]]이 되었으며,[* 다만 로시야 텔레비전이 만들어진 것 자체는 1991년으로 매우 늦었다. 러시아를 제외한 타 구성국에서는 자국어 텔레비전 채널이 있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미 중앙방송에서 [[러시아어]]로 송출하고 있었고, 프로그램 3과 프로그램 5에서 지역방송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러시아인을 위한 채널을 편성할 필요가 작았다.] 나머지 채널들은 지역 국, 공영채널이 되거나 민영화되었다. TV에서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건강, 동물의 세계, 영화파노라마, 국제파노라마, 농촌시간 등 장수프로그램의 수가 상당했고, 일부는 현 러시아에서도 방영하고 있었지만 소련 제1프로그램과 제2프로그램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들은 1편짜리 TV영화(한국으로 치면 [[단막극]] 비슷한 위상이다.)와 [[미니 시리즈]]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에서 생각하는 TV연속극 류의 드라마는 중앙채널에서 편성되지 않고 각 공화국 지역방송사에서 소규모로 제작되었다 또한 토론 방송이나 자극적인 오락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오락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편성할 프로그램은 다 편성했지만 동시에 상당히 심심하고 보도의 신속성도 떨어졌다는 평도 있었다. 이렇듯 1960년대에 텔레비전 공장의 대량 건설로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었지만 소련제 텔레비전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단순히 지직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툭하면 폭발하곤 했다'''. 텔레비전 한 대만 날려먹으면 운 좋은 편이었고, 사망 사고도 있었으며 크바르티르(아파트 방)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는 일도 파다했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던 텔레비전 세트는 루빈-714(Рубин-714)라는 모델이었는데, 특히 잘 터지는 걸로도 유명했다.] 1980년 무렵 [[모스크바]]의 화재 원인 중 두 번째로 높은 원인은 과열된 텔레비전의 폭발이었다.[* 출처: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1980년 브라운관 폭발 사고는 2,126건이었고 1985년 이 수치는 두 배 이상 증가하여 5,490건에 도달하였다.[* 출처: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紙의 보도] 이러다 보니 소련 방송사들은 텔레비전 방송이 끝난 직후 삑삑거리는 비프음과 함께 "텔레비전을 끄는 것을 잊지 마시오(Не забудьте выключить телевизор)"라는 문구를 송출하였고[* 여담으로, 조용한 밤중 번쩍이는 화면에서 1초마다 나는 비프음과 섬뜩하게 보이는 경고문은 많은 소련 어린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문구는 [[소련 붕괴]] 후 [[보리스 옐친|옐친]] 시절까지도 계속 방영되었는데, 소련이 붕괴되었다고 해서 소련 시절 텔레비전까지 싸그리 사라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에는 불이 나면 소방대가 출동했지만,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옐친 시절에는 출동할 소방대도 온데간데없었다는 차이점이 있긴 했다.~~] 내무부에서는 텔레비전을 안전하게 쓰는 법에 대한 공익 광고를 제작해 송출하였다. 당시 소련 전자제품 판매대리점들은 텔레비전 수리로 먹고 살았고, 소련 인민들 사이에서는 낮 시간 동안 텔레비전 방송을 방영하지 않는 이유가 텔레비전 폭발을 막기 위한 당국의 배려라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 채널에 따라 다르지만 평일에는 12시에서 14시 사이 혹은 14시부터 16시까지가 정파 시간이었다. 종종 영상 대신 라디오 방송을 수중계하는 경우도 있었다.] [youtube(ob3-_v_B_tQ?t=187)] ([[1989년]] [[브레먀]]의 마무리 장면.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예의 문구가 송출된다.) 소련 텔레비전에서 화재가 자주 난 원인은 당시 TV 구조를 살펴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 당시 텔레비전은 스위치를 켠다고 바로 켜지는 것이 아니라 20초에서 1분 정도 예열을 시킨 다음에야 화면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TV방송 초기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코노TV가 출시되기 이전까지 TV를 보려면 스위치를 켠 다음 예열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방식의 경우에는 화재의 위험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고열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 제작된 텔레비전들은 진공관 형태의 부품을 다수 포함했던데다가 저질 플라스틱 및 가연성 소재를 듬뿍 사용하였고[* 당연히 텔레비전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브라운관도 질이 상당히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품질관리체계가 [[안전 불감증|많이 부실한 편이었기에]] 본체가 조금이라도 낡거나 브라운관이 과열되면 부품이 폭발하고 불붙은 가연재가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텔레비전들은 대량생산을 하기 좋았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생산되었다. 당시 해외에서 생산된 TV를 구입할 형편이 안되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이 과열되면 꺼서 식히는 식으로 수십 년간 사용하기도 했다. 다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TV 생산량이 연 수백만대는 되었기 때문에 [[코메콘]] 및 사회주의권 국가를, 제3세계 국가들 상대로 TV를 원조 또는 수출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영향으로 수입시장이 개방되자 [[토시바]] 텔레비전 등 품질이 우수한 해외 제품들이 각광받으면서 소련제 텔레비전을 빠르게 대체했다. 소련은 1967년 처음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다. 당시 [[공영방송]]에서 보수적으로 [[네덜란드]]의 TV광고 시작년도가 1967년, 프랑스가 1968년이며, 1990년대에야 TV광고를 개시한 북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빠른 축에 속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라는 통념과는 달리 TV 광고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광고시장도 제법 컸다고 한다. 물론 아무시간에 광고를 방영하는 건 아니고 특정 시간에 한해 광고를 묶어 편성했고 당대의 TV편성표를 보면 광고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독일에서는 공영방송에 한해서지만 그 잔재가 남아 있고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등도 하루에 몇번씩 광고를 묶어 편성하는 식이었다.([[블록광고]]) 한국에서도 1981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KBS 1TV에서도 이런식으로 광고를 편성했지만 1994년에 KBS 1TV의 광고가 폐지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다만 이들 광고 중에서 보존되어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서 1978년에 TV 광고가 도입되고 [[북한]]에서 2009년에 도입된 것에 비하면 월등히 빠르기는 했다. 물론 이때는 상품의 가짓수가 몇 종류 정도였던데다가 질좋은 상품은 빨리 매진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생산되지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방영하다 보니 당시 소련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어 광고 효과는 적었고, 이 때문에 당시 소련TV에서 분명히 광고가 방영되었음에도 광고가 없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의 고르바초프 때 와서부터였고, 전 시간대에 광고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 붕괴]] 이후의 일이다. 러시아는 아니지만,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스토니아]]에서 제작된 광고가 한 때 유튜브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다만 저작권 문제로 인해 현재는 전부 삭제되었다.][* 하지만 현재 에스토니아 텔레비전(ETV)에서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고 있는데 에스토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인구가 140만명 안팎으로 적다보니, 새로 출범한 민영방송들이 적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2년에 광고가 폐지되었고 현재는 국가예산으로 재원이 충당되고 있다.] 라디오의 경우 65.00 ~ 74.00MHz(30kHz)의 OIRT FM이라는 별도의 FM대역이 있으며 러시아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송출하고있다.[* 지금은 그 시절 수신기에 CCIR FM을 청취하기위한 변환기가 있다.] [[라디오]]나 [[전축]]은 주로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에서 생산되었으며, 라트비아에서 라디오/전축을 만들던 Audiotehnika사의 경우는 소련 해체 이후 일본산 가전제품에 밀려 타 업종으로 변경을 거듭하다가 오늘날에는 수입 오디오 도매업체로 업종을 변경했다. [[파일:Radio Tehnika 1.jpg|width=40%]] [[파일:CF08ACBA-DDDE-4C47-8A8B-9C1C0C7406BD.jpg|width=57%]] [[파일:sokol radio.jpg|width=44%]] [[파일:RadiotehnikaML6201_p1n.jpg|width=53%]] 소련에서 라디오를 열심히 보급하고 음악 분야에 검열을 비교적 느슨하게 한 이유는 복지 차원도 있지만 정치 선전의 목적이 컸다. 물론 라디오에서 하루종일 정치 선전과 연설만 나오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공짜로 줘도 받기 싫어했을 테고, 때문에 소련 라디오 방송은 주로 듣기 좋은 음악을 계속 틀어주다가 중간중간에 뉴스나 정치 선전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라디오는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들에게 러시아어를 보급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TV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라디오가 [[표준어]]를 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한 점은 서유럽/남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