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군 (문단 편집) === 부실한 [[병참]] 능력 === [[허장성세|분명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나 전투력은 무시무시했지만, 사실 그 내실은 부실한 측면이 많았다.]] 특히 방대한 전투력을 유지시킬 보급 능력과 지원 병과에서 그 열악함이 두드러졌다. 이는 소련이 무리할 정도로 군대의 체급을 키워놓는 바람에 발생한 문제였다. 당장 전투 장비의 수량을 유지하는 데만 여력을 집중하다보니 전투 분야를 뒷받침해주는 비전투 분야가 부실해진 것이다. 비전투 분야에서의 열악함은 보급, 의료, 교육 및 훈련까지 그 전반에 걸쳐 심각했다. 이러한 문제는 전신인 러시아 제국군도 가지고 있었고, 후신인 현대 러시아군에도 계승되었다. 냉전 당시 [[동구권]]과 서구권은 경제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권과 대등한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은 소련에 심각한 부담이었다. [[바르샤바 조약]]에는 소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중진국]] 수준이었던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중심국가였다. 반면, [[NATO]]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이자 경제강국 및 군사강국들이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독자노선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도 준 가맹국이었다.[* [[http://sonnet.egloos.com/3644278|참조 블로그]]] 소련과 미국만 일대일로 비교하면 70년대 후반 즈음에는 소련군의 국방비가 얼추 미군과 대등한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력과 동맹국의 양질에서는 나토가 바르샤바 조약국에 비해 넘사벽이었다. 결국 무리하게 키운 체급을 유지하느라 군수지원, 의료지원 같은 지원 분야는 부실해져갔다. 특히 탄약 등의 군수물자 비축량은 비실전적인 것을 넘어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일례로, 소련군이 미군의 [[험비]] 한 대를 상대하기 위해 할당한 [[DShK]] 기관총탄의 숫자가 겨우 '''2발'''이다. 단 두 발로 미군 험비를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소련제 중기관총의 성능이 우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지 않으면 계산이 맞지 않을 정도로 비축 탄약량과 탄약 생산력의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약이 부족했어요. 그 흔한 [[요오드]]조차 없었죠. 제때 공급이 안 되거나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거나 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네 계획경제란 거였어요. 그래서 전리품이나 수입품을 어떻게든 구해다 썼어요. 나는 늘 일본제 일회용 주사기를 20개씩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일본제 주사기는 부드러운 [[폴리에틸렌]] 포장에, 덮개를 벗기면 곧바로 주사를 놓을 수 있게 돼 있거든요. 우리 소련제 "레코르트"(소련제 주사기)는 주사기를 싼 종이가 툭하면 찢어져서 살균이 안 되기 일쑤였어요. 거기다 주사기의 반은 주사가 안 되고 주사기 플런저가 아예 움직이지 않았어요. 쓰레기나 다를 바 없었어요. >대체혈액은 유리병에 0.5리터씩 담겨 공급되었어요. 중상자 한 명을 치료하는데 2리터의 혈액이 들어가거든요. 즉 혈액 4병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아무리 머리를 쓴다 해도 어떻게 전장에서 그 병들을 한 시간이나 팔 높이만큼 쳐들고 있겠어요?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리고 한 사람이 병을 날라봐야 얼마나 나를 수 있죠? 이탈리아인들이 뭘 만들었는지 아세요? 1리터짜리용 폴리에틸렌 봉지예요. 얼마나 튼튼한지 군화를 신고 그 위에서 펄쩍 뛰어도 터지질 않아요. >그리고 흔한 붕대, 살균붕대조차 소련제는 형편없었어요. 포장지가 참나무로 됐는지 붕대보다 더 무거웠죠. 태국제, 오스트리아제 같은 수입제품은... 왜 그런지 더 가늘고 하앴어요. [[붕대|탄력붕대]]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프랑스제, 독일제가 있었지만... 전리품으로 얻었죠. >우리 국산 부목은 또 어떤 줄 아세요? 그건 스키 타기에나 좋지, 의료용 기구가 아니었어요. 그런 걸 한 사람이 몇 개나 휴대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영국제 부목을 가지고 다녔어요. 팔뚝용, 정강이용, 대퇴붕요, 이렇게 각각 신체 부위별로요. 지퍼가 달려 있고 공기를 불어넣어 부풀릴 수 있었죠. 팔을 끼워맞추고 지퍼를 채워 고정시켰어요. 그러면 부러진 뼈가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고정돼서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었어요. >최근 9년 동안 우리 나라에선 새로운 의료용품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어요. 붕대도 그대로, 부목도 옛날 그대로죠. 소련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먹히는 병사예요. 참을성도 제일 많고 다루기도 수월하죠. 보급품도 못 받고 보호도 못 받는 병사. 일회용 소모품이죠. [[독소전쟁|1941년]]에 딱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50년이 흐른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지금]]도 마찬가지죠. 왜 그럴까요?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정찰중대 위생사관 출신 원사(старшина)의 증언.[* 출처: 아연 소년들, pp. 114-1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박은정 옮김.][* 같은 책에서는 군인이 피복이나 철모나 통조림 등을 받고 보니 1930~50년대 생산품이더라는 다른 증언도 나온다.] 의료지원의 수준은 더욱 처참해서, 기껏해야 2차 세계대전 때보다 살짝 나은 수준이었다. 아프간 전쟁 소련군 참전용사가 쓴 수기에도 ''''그래도 대조국전쟁 때보다는 나은 의료지원을 받고 있었다''''라는 비참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민간 사회의 의료 수준도 군사병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야전군이 양질의 의료지원을 제공받기는 힘들었다.[* 다만 살릴 수 있는 부상을 당했는데 조치가 안 돼서 죽었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사망직전인 중상자라면 가망이 없어서 포기하는 정도였다. 애초에 이 지경이면 현대 미군을 제외하고는 살릴 방법이 없다.] 소련군의 열악한 야전 의료지원을 보여주는 자료는 많다. 대표적으로, 소련-아프간 전쟁에서의 의료지원 기록들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은 [[풍토병]]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했고, 작전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http://fmso.leavenworth.army.mil/documents/afgmed/afgmed.htm|해당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체 파병병력의 67%에 달하는 41만 5천명의 인원이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받았다. 게다가 이중에서 [[폐렴]]은 무려 20%, [[말라리아]] 4%에 [[이질]][* 그냥 설사만 하고 마는 병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CDC]]에 따르면 매년 전세계에서 110만명이 사망하는 병이고, 전장에서는 매우 흔하다. 그나마 그 피해를 최소화한 군대는 미군 정도.] 등도 많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의 질병 입원 비율도 비슷하게 35% 정도였다. [[http://whqlibdoc.who.int/bulletin/1993/Vol71-No3-4/bulletin_1993_71(3-4)_385-388.pdf|이 논문]]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으로의 말라리아 감염 경로에 관한 논문이다. 여기에는 '''7,600명의 병사가 말라리아에 걸린 채로 그냥 전역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이중 70%는 군대에서 단 한 번도 말라리아 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반면 이후에 벌어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시 미군은 2006년부터 2008년 전체 감염자 숫자가 고작 179명,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170명에 불과했다.[* Falling rates of malaria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in Afghanistan substantiate findings of high compliance with daily chemo prophylaxis, - Remington L. Nevin, 2012/12] 비전투용 군수품의 부족도 소련군에서 일상적이었다. 이는 소련 특유의 [[생필품]] 부족 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다만 이건 소련에서 악의적으로 군인 복지에 관심을 안 가져서는 아니고, 중요도가 높은 곳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자하는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정책 결정자들이 집중 투자한 분야는 자원이 넘쳐나는 반면, 그들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분야는 심각한 물자 부족이 일어나는 것이다.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군대를 보유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소련군은 수천 달러짜리 포탄을 수없이 퍼부었지만, 정작 군인들은 치약 같은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순한 보급품만이 아니라 아예 핵심 장비나 설비를 적국인 서방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시 소련의 민간 소비재에 대한 연구와 생산이 크게 뒤쳐지다보니 발생한 문제였다. 공작기계, 전자장비, 에어컨 같은 분야는 서방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수입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소련도 이런 제품들을 아예 생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서방과 기술력 및 품질에서 격차가 너무 컸다. 특히 전자, 컴퓨터, 소프트웨어 같은 분야는 학문의 기반 자체가 서방에 비해 크게 빈약했다. 그나마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수학, 물리 등의 기초과학은 소련도 미국과 나름 비견되는 수준을 유지했다.[* 소련은 이런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성과도 꽤 냈다.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되는 [[확률론]]이나 [[확률과정론]] 같은 분야는 거의 소련에서 완성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필요했던 고품질 전자기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민간 주도의 전자공학과 응용과학의 발전이 뒤따라야했다. 결국 끝까지 해당 분야가 지지부진했던 소련은 해당 제품들을 몰래 수입해서 사용했다. 군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소련의 농업이 부실했던 것도 약점이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식량 수출 금지를 검토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대외 식량 수입국 1위가 미국이었다. 그만큼 소련은 자국 식량 수요의 상당량을 '''적국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에는 비옥한 농토 지대는 매우 많았다. 그러나 비효율적인 [[집단농장]]은 소련의 농업 생산 효율을 크게 갉아먹었다. 현대 러시아 연방은 경제적 여건이 소련보다 크게 악화된 와중에도 농업의 생산성만큼은 오히려 소련보다 크게 나아져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제재 때문에 국제경제망에서 사실상 퇴출됐는데도 굶주리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