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문단 편집) === 남대문(南大門) === 숭례문은 "도성의 남쪽 대문"이라는 뜻의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자주 불렸다. 정식 명칭이라기보다는 일반 명사로 시작하였으나[* 어느 성곽이나 남쪽 문은 남문 또는 남대문이라 불렸으며 특히 개성 내성의 남문은 공식 명칭이 남대문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숭례문보다 훨씬 보편적으로 불려온 명칭으로 보인다[* 한성이 서울로 자주 불리고, 수원 장안문이 보통 북문으로 불린 것과 유사하다.]. 특히 한문을 잘 모르는 서민의 경우 현판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다 직관적인 "남대문"이 지배적으로 쓰였으며,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언급 빈도로 볼 때 한문을 잘 알던 권력층에서도 "남대문"을 매우 자주 사용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단순 계산으로 <실록>은 '남대문' 252건, '숭례문' 203건이며 <승정원일기>는 '남대문' 212건 , '숭례문' 1516건이다.] 1996년까지는 "서울 남대문"을 공식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사실상 고유명사화되어 주변 지명도 전부 "남대문"을 사용하였고('남대문'시장 등), "숭례문"은 거의 잊혀질 정도였으나 이후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울 숭례문"으로 개칭하였다. *'''일본과의 관련성'''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당시 기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기 전에는 "남대문(南大門)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강제로 개명시킨 이름이다(혹은 비하적 명칭이다)"라는 설이 꽤 유명했는데, 특히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시민들의 숭례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이 속설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기도 했다. 이는 잘못 알려진 [[일본어 잔재설]]의 대표적 예로, 상기했듯 조선시대부터 남대문이라는 이름은 널리 쓰였다. 이는, 1934년 일제가 사적 지정을 하면서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남대문",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통상 명칭으로 등록했다는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남대문", "동대문"이 당대에 많이 쓰였기 때문에 명칭으로 쓴 것이지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재 명칭으로 정식 명칭을 배제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에도 1962년 일본의 문화재 목록을 답습하여 "서울 남대문", "서울 동대문"이라는 이름을 30년 이상 유지하면서 숭례문, 흥인문이라는 정식 명칭이 거의 잊혀지는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결국 1996년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지문"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https://imnews.imbc.com/replay/1996/nwdesk/article/2011251_30711.html|#]] 이러한 주장은 일제의 지배와 그에 대한 반감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한 여러 속설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고 숭례문이라는 정식 이름이 다시 (조선시대보다도) 널리 알려지는 데에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 일부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꾸로 "남대문"이 묻히거나 배제되는 부작용도 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도 "남대문"이 널리 사용되었음이 기록에 잘 나와있으므로, 정식 명칭을 존중하는 의미라면 몰라도 이러한 이유로 "숭례문"을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 *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록의 예시''' - 숭례문이 처음으로 언급된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9024_002|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9월 24일 기사]]부터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이라 하여 보통 동대문, 남대문으로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해당 실록은 1413년 3월 편수하고, 1448년 6월 증보 편수하였으므로 적어도 1448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속(俗)은 속되다, 천박하다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간에서는, 백성들은' 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칭~~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은 물론 신하나 군주들까지도 즐겨 남대문, 동대문 등으로 불렀다. - 세종 9년 1월 26일 기사에는 '上曰: 明日置𧪚于南大門外愼以衷之家'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은 세종대왕이다. 그 외에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도 남대문이라고 부른 기사가 있으며, 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성종14년 12월 4일에 보면 '南大門內行[[廊]][[失]]火, [[延]][[燒]]十[[餘]][[間]](남대문내행랑실화 연소십여간)' 이라 하여 남대문이라고 적어놓았다. - 《[[매천야록]]》을 저술한 매천 [[황현]](1855~1910)은 [[경술국치]] 16일 후 절명시를 남기며 자결한 인물로, 야사임을 떠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임에 주목하자.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리(千里)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泰山)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했다.[* 원문: 雲峴之始得政也, 甞因公會, 盛氣向諸宰曰, 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이에 많은 재상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는데 [[김병기]]가 머리를 들고 말하길, “천리를 지척으로 하려면 지척이 될 것이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하려면 삼층이 될 것입니다. 대감이 지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태산은 본디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하길, “혼자 잘난척 하는군.”이라 했다. 대저 천리 지척이라는 함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 함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 평지라 함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말이다. >---- >《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 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