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porta-nuova-palermo-summer-afternoon-porta-nuova-98870337-1.jpg]][* 팔레르모 대성당 근처에 있는 포르타 누오바이다.] 시칠리아를 거쳐간 4개의 민족. (아랍, 그리스, 게르만, 라틴)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고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군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킨 데에 이어 이탈리아까지 병탄하면서 다시 로마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도 사산조와의 전쟁, 페스트, 그리고 갑자기 출현한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쇠퇴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차차 물러나게 되는데 시칠리아도 잃게 되어 이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의 [[기독교]] 세력 사이에서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게 되었다.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9세기에 걸쳐 시칠리아에는 [[아글라브 왕조]]에 의한 [[시칠리아 토후국]]이란 이슬람 국가가 세워졌고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중흥기를 맞은 동로마 제국이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11세기 초에 시칠리아를 다시 정복하려 하였는데]], 이때 북방에서 니타난 신흥 세력이 바로 [[노르만]] 족.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지휘아래, 이들은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서 패권을 놓고 싸우던 동로마, 이슬람, 독일, 교황 세력 모두를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 ~ 시칠리아에 노르만계 왕조인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노르만 인들은 교황과 동맹하였기에 시칠리아 역시 기존의 동방 정교나 이슬람 대신 가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시칠리아 왕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우 로제 드 오트빌이 이어받았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남 이탈리아를 정복해 세력을 넓혀 근대까지 왕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이른바 양 시칠리아 왕국. 중세왕국의 특징에 따라 단일혈통 왕국이 아닌 결혼과 상속을 통해 계속해서 바뀌게 되었다. 왕국을 성립시키고 발전시킨건 노르만계(오트빌 왕조)지만 이후 이 계통이 단절되면서 사위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이 물려받았다.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 동안 시칠리아에서는 “길게 기른 수염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그다드 출신의 천문학자들과 아랍어 저술을 번역하며 후한 급료를 받는 유대인들, 사라센의 무용수와 무희들, 축제 때면 은나팔을 불던 무어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자신과 그의 아들 [[만프레디]]는 열렬한 아랍 문화 애호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슬람 철학과 학문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많은 중상을 받았다. 비난에 아랑곳 않던 이들의 후원 하에 아랍의 학문은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들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체를 원했던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결국 [[교황]]과 반목하게 되었고[*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못하고 있던 큰 이유가 중부에 교황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원했던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결탁해 당시 카페 왕조의 왕인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백 샤를을 초빙해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왕으로 삼았다. 앙주백 샤를 [[카를루 1세]]를 칭한 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원정[*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과 원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시칠리아에 물렸고 이는 많은 반감을 사게 되어, 결국 [[시칠리아의 만종]](1282)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앙주 일가는 시칠리아에서 쫒겨났고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인 만프레드의 사위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반란군의 환영을 받고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에 반대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무금지 조치를 내리고,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페드로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하이메 2세]](1285~1295)는 발렌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아라곤 왕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사르데냐-코르시카 왕국을 아라곤 연합 왕국에 추가시켰으나, 이는 1세기도 가지못했다. 프랑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여 이번에는 승리해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프랑스, 나폴리, 교황은 서로 동맹을 맺고 아라곤 왕 페드로 3세(Pedro III)를 파문한 뒤 맞서 싸웠지만 아라곤 왕국의 군대는 그들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위엄을 떨쳤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카탈루냐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까지 진출해 아테네 공국(1311)[[https://en.wikipedia.org/wiki/Duchy_of_Athens|#]]과 네오파트라이 공국(1318)[[https://en.wikipedia.org/wiki/Duchy_of_Neopatras|#]]을 접수했다. 한때는 몰타와 사르데냐 섬도 잠깐이나마 지배했고 1442년에는 앙주 가문을 몰아내고 남부 이탈리아를 모조리 관할하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까지 차지하면서 거대한 지중해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날 [[스페인 국왕]]의 기나긴 공식 타이틀에 아테네 및 네오파트리아의 공작이 들어 있는데 이 때로부터의 흔적으로서, 당시의 아라곤 왕국이 현대 스페인으로 [[국가승계]]되면서 타이틀까지 덩달아 승계된 것이다. 물론 무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에 대한 영유권을 오늘날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파일:Monreale_BW_2012-10-09_09-52-40.jpg]] 동로마 통치 시대인 827년에서 아랍 통치 시대의 요소는 다음 노르만 왕조 시대(1071~1266)의 미술에 계승되어 팔레르모의 궁정예배당(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 몬레알레 대성당(Cattedrale di Monreale), 체팔루 대성당(Chiesa di Cefalù)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미술에는 동로마적 요소와 함께 이슬람 파티마 조의 미술 전통이 존속되었다. 견직물은 아랍인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제조가 시작되고 다시 유럽으로 퍼져갔다. 남이탈리아와 함께 상아 세공이 발달하여 일군의 채화장식으로 된 상아상자는 12~13세기의 시칠리아 제로 되어 있다. 13세기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Ⅱ, 1194~1250, 나폴리 시칠리아왕으로는 프리드리히 1세. 1215년 이후 신성로마황제] 시대는 동서문화의 융합을 꾀하여 시칠리아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시대로 문화적으로 활발하였으나 섬 내에서 당시의 미술 유물은 적다. 1442년부터 다시 [[나폴리 왕국]]과 함께 동일한 스페인 왕의 관할 하에 있게 되어 남이탈리아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15세기에 활약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는 시칠리아가 탄생시킨 가장 유명한 화가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은 [[스페인]]의 영향이 강하고 바로크 도시로서의 노토(Noto)는 당시의 양상을 가장 잘 전해주고 있다. 시칠리아의 미술은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항상 외래미술의 영향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