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크교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현재 [[인도]]에서는 시크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할리스탄을 요구하는 시크교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어서 [[인도]] 정부의 골치를 썩히고 있다. 연방제 인도 하에서는 자신들의 [[주(행정구역)|주]]라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독립운동을 막고자 1984년 6월 1일에 시크교 성지인 아칼탁트([[암리차르 황금사원]] 안에 있는 건물) 공격을 명령했던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는 [[인도군]] 내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시크교 출신 장군들 반발에 부딪쳤다. 아두르 파즈한 싱 대장을 비롯한 시크교도 장군들은 외려 반발만 일으키고 내전을 부채질할 것이며, 나아가 '''"총리도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싱 대장을 비롯한 반대파를 해임하고 아룬 바이디야 대장과 시크교도로 유일하게 작전에 참여한 쿨딥 싱 브라르(1934~ ) 중장을 지휘관으로 황금사원에 군대를 보내니 이를 [[블루 스타 작전]]이라고 한다. [[인도군]]은 블루 스타 작전으로 인도군 83명, 시크교도 492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뒤에 참전한 인도군 간부들이 10배 이상을 줄였다고 비난하면서 논란이 거세진다. 시크교 측은 대략 5천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인도군도 3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당시 전선에서 지휘하던 브라르 중장은 아칼탁트에 포격을 가하고 전차를 투입하는 바람에 시크교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더불어 파즈한 싱 전직 장군이 예측한 대로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시크교도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무장해 있던 [[기관단총]]을 인디라에게 탄창이 텅텅 빌 정도로 쏴버렸고, 그래서 인디라 간디의 시체 사진을 보면 매우 끔찍한 수준이다. 시크교와 무관하지만 아들 라지브 간디도 [[스리랑카 내전]]에 간섭하다가 어머니가 죽은지 7년 뒤에 그 보복으로 [[타밀족]]이 자폭테러를 일으켜 시체가 반토막나는 끔찍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베안트 싱은 그 자리에서 다른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고, 사트완트 싱은 부상을 당한 채로 잡혀 재판을 받고 1989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시크교 성직자들은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고 이 2명을 성자로 추앙하며 아칼탁트에 헌배했고 이 2명의 유족들도 자랑스러워했다. 이 암살 덕에 인도 각지에서 시크교도들이 마구 공격받으면서 이들도 저항하는 통에 추정으로만 시크교도 및 힌두교도를 합쳐 약 2~4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시크교도 학살에 인도 정부는 외면했고 열받은 시크교 과격파들은 [[인도항공 182편 폭파 사건]]을 비롯한 테러로 맞대응하고 인도 정부가 국제적 비난을 당하면서, 부랴부랴 학살에 대하여 책임소재를 따지네 뒷북을 쳤다.[* 시크교는 테러를 일으켰다는 비판은 피할수 없긴 했으나, 시크교가 당한 학살이 너무 대규모인지라 학살을 방치한 인도정부를 비난하는 여론이 더 높아졌다. 9.11 테러 이후에 이런 사건이 낫다면 시크교가 독박을 썻겠지만, 당시에는 '그나마' 테러에 관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크교가 어느정도 이해를 받았고 인도정부에 국제적으로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들을 극렬하게 탄압하고도 그들을 계속 경호원으로 쓴 이유는 시크교도들은 사람고기 빼고 죄다 먹는다고 할 정도로 육식과 운동을 권장하고 힘을 키우는 걸 장려했기 때문에 체격이 워낙 좋고 강해 오래 전부터 군인이나 경호원으로 선호된 까닭이다.[* [[성룡]] 영화 [[프로젝트 A]]를 보면 [[홍콩]] 총독부를 지키는 군인도 터번을 쓴 시크교도가 나오는데,(극중 대사도 없고 총독부 건물을 둘러보다가 성룡이 몰래 잠입한 걸 보고 놀라는데 홍콩 경찰간부인 원표가 그냥 보초나 서라고 명령해 그냥 간다.) 제대로 고증에 맞는 묘사다. 실제로 시크교도들은 [[영연방]] 여기저기서 중요시설 경호담당으로 자주 등용됐다. 왜 그런가 하면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는데다가, 다른 종교의 강압에 맞서고자 군사훈련이라든지 운동을 장려하기에 무예 및 총기도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구르카]]와 달리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어 및 예방책으로 맞서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런 점으로 경호담당으로 딱 알맞았기에 지금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옛 [[영국]] 식민지이던 국가를 가보면 터번 쓴 시크교도들이 경호원이나 특급호텔 및 박물관이나 여러 큰 건물에서 경비원 등으로 자주 보인다. [[자이나교]]도들이 채식하고 머리를 써가면서 경제를 잡은 것과 대조적이다. 인도의 지하철이나 헬스장에 가보면 시크교도들의 [[크고 아름다운]] 위엄을 체감해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그마한 힌두교도들과 대대적으로 한판 붙었던 [[세포이 항쟁]] 때 왜 수적으로 우세한 힌두교도들이 발렸는지 납득이 간다.] 안 그래도 인디라 간디에게 측근들은 "동포들의 죽음에 분노한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해고하라." 는 권유를 했으나,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들은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보다 자신을 더 따른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경호원들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인디라 간디는 총에 맞기 직전까지 경호원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디라의 죽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당시 블루스타 작전 사령관 바이디야 대장도 1986년 8월 10일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던 길에 시크교 특공대의 기관총 공격으로 8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즉사했다. 그리고 시크교도들에게 배신자로 몰린 브라르 [[중장]]은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이후로 암살 위기를 7번이나 겪어 부상을 당했으며 이후 군복을 벗고 숨어살아야 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 역시 그와 절연을 선언하고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2012년 10월 1일 [[런던]]에 아내와 같이 여행을 갔지만 거기서 살고 있던 시크교도에게 공격을 받아 칼에 목을 맞고 큰 부상을 입었다.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았지만 후유증이 심해 남은 평생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범인들은 영국에서 살인 미수로 10년이 넘는 징역형에 처했는데 시크교 커뮤니티에서 이들을 영웅화하여 좋은 사식도 넣어주고 석방되면 돈이나 여러 모로 보상한다라고 시크교 신도들은 아주 좋게 볼 정도로 브라르는 악마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브라르는 2020년 현재 86살 고령으로 [[뭄바이]] 어느 곳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부상 여파가 아직도 남아서 거동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다수로 거주(약 3천만 명)하는 [[펀자브(인도)|펀자브 주]]가 바로 [[파키스탄]]의 [[펀자브(파키스탄)|펀자브 주]]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종교 특성상으로도 [[파키스탄]]과 친하게 지내기 어렵기에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에도 시크교도들이 많이 활약했다. 하지만 펀자브 주는 인도 전체 [[쌀]] 점유율 25%, [[밀]] 20%, 콩 및 여러 농작물 상당수의 재배를 책임지는 곳이라 [[인도]] 정부로선 펀자브를 중심으로 하는 할리스탄(시크교도들의 나라 이름) 독립을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크교도와의 분쟁은 이 일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잦아든 편이며, 시크교도 정치인 [[만모한 싱]]이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인도 총리|인도의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온 비운의 집단이다. 종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 이 후로 시크교도들은 인두세를 내고, 학살당하는 등 이슬람 정권 내에서 주요한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 때는 마찬가지로 고통받았던 힌두교도들과 굵직한 갈등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후 인도의 독립 과정에서 발생한다. 영국의 인도인 분리 통치 정책에 의해 이슬람과 힌두교 두 축으로 나뉜 인도의 대다수 집단들은 후에 성장하여 독립단체로 변모하여, 독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크교도들은 그들에 비해 소수였고, 일부 지역(주로 펀자브)에 집중하여 세력을 형성했으므로[* 시크교도들은 사실 영국군에 복무하는 등 독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인도는 넓은 국토와 험준한 데칸 고원의 존재 때문에 고대 이후 통일 국가에 의해 통치된 시기가 매우 짧아서 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적 유대는 없다시피 하고, 더욱히 힌두교와 시크교는 더더욱 공감대가 적다. 힌두교도끼리도 분열되고 싸우던 걸 초대 수상 [[자와할랄 네루]]와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이 탱크를 몰고 가서 진압하고, [[마하트마 간디]]라는 키워드로 간신히 모은 것이 인도 공화국 초기의 성립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그 결과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로 독립하는 와중에도 시크교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남인도의 드라비다 인종들과 마찬가지로 북인도 힌두인들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 것이 할리스탄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할리스탄 독립 운동은 [[펀자브(인도)|펀자브 주]]에 대대적으로 실시된 녹색 혁명으로 큰 경제력을 얻은 시크교도들의 지원으로 진행되었으나, 결국 아요디아 사태를 촉발해 힌두교와 시크교는 극단 대립상황에 빠진다. 이 대립상황은 1994~1995년 경에서야 진정되는데, 사실 대다수 시크교도들은 장기간에 걸친 분쟁에 지쳐 있었으며, 무장투쟁과 테러 등은 시크교의 전통 무장조직인 칼싸 조직인 아깔리 달 내 강경파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친 시크교 평신도들의 지원 거부로 겨우 진정된 것이니 시크교 평신도 입장에선 억울할 만도 하다. 또한 아요디아 사태와 이후의 할리스탄 독립운동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진 시크교도 사냥 과정에서 시크교도들이 겪어 온 비극도 잘 알려져 있다.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긴 머리와 수염, 터번을 보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힌두교도들을 피해 종교적인 이유로 평생 지켜왔던 터번을 벗고 수염과 머리를 깎아야 했으며, 주기적인 힌두교도들의 시크교 지역 [[레이드]]를 피해 재산과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이 시기에 [[델리]]와 수도 [[뉴델리]]로 도망간 시크교도들의 수효가 얼마나 많았는지 델리의 문화가 크게 변화하였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에 90~00년대만 하더라도 델리의 [[릭샤]]왈라[* 인도하면 떠오르는 자전거 택시나 오토바이 택시기사를 뜻한다.]는 거의 대다수가 시크교도였을 정도이니 그 참상은 말로 다 못다할 정도였다고 하겠다. 또한 시크교도들에게 아요디아 사태와 뒤 이은 시크교도 대학살 사건들은 절대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