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미양요 (문단 편집) === 조선 측 ===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 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했다.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대원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인해 물러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 사건|운요호]]를 보내자, 신미양요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던 강화도의 수비 병력들은 [[포함]] 한 척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고, 결국 조선은 개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운요호는 배수량 249톤밖에 되지 않았고 승조원도 수십 명에 불과한 작은 배였는데도, 이미 이전에 커다란 피해를 당한 조선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측은 병인양요와 달리 전술적퇴보를 보였는데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방어전을 적절하게 진행해 문수산성,정족산성 전투들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나름의 사상자를 내게한것과 달리 신미양요에서는 이러한 전술적이점을 말아먹었으며 조선군은 프랑스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기전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출혈을 내게한뒤 강화도 내륙 정족산성으로 끌어들여 승부를 봤는데 게다가 정족산성은 방어력이 굉장히 높은 산성으로 평지와 해안가에 있어 방어력이 상당히 약한 광성보와 비교하면 방어력이 높은편이며 전술도 엉망이라 미군을 대모산과 광성보로 끌어들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작 화승총의 사거리를 계산하지 않는바람에 계획을 말아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