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싱가포르 (문단 편집) === 독립 이후 === [[리콴유]]는 아무 것도 없는 조그만한 섬인 싱가포르가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 물자를 대는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말레이시아에 속한 [[조호르]] 지역이 후방에서 받쳐줬고, [[말레이시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싱가포르 자체적으로 식량이나 식수 수급은 불가능했고 배후지역인 조호르를 통해 공급받았기 때문에 조호르의 여러 항구를 잃고 싱가포르항 한 곳만 경영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하고도 그런 역할을 지속하며 국가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었다.[* 비슷한 예로 홍콩을 들 수 있다. 조차한 [[신계(홍콩)|신계]] 북부 지역과 달리 [[홍콩 섬]] 및 [[구룡반도]] 그리고 [[신계(홍콩)|신계]] 남부 신구룡은 [[영국]]에 할양된 땅으로 영국에 완전히 귀속된 상황이었다. [[1997년]] 반환시기 때도 [[신계(홍콩)|신계]] 북부지역만 반환할 의무가 있었고 [[홍콩 섬]] 등은 영국이 원한다면 영국령으로 존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콩 섬]]+ 구룡 + 신구룡만 가지고 홍콩을 존속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홍콩 섬 등 도심지역들도 같이 반환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를 홍콩에 비유하자면 [[홍콩 섬]]만 독립당했다고 볼 수 있다.] [[리콴유]]는 [[영국]]에 [[친영|호의적]]이었고 [[영국]]과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과 절대적으로 [[영국-싱가포르 관계|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인민행동당]] 인사들도 영국 유학파들이 많았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별 무리 없이 [[영연방]]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인 [[리콴유]]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강제 독립을 당한 이후에는 외교 리스크 극복을 위해 [[소련]] 등 이른바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한 때는 [[싱가포르 여권]]으로 [[북한]] 무비자가 가능했다.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균형외교와 별개로 북한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으며 북한의 화성급 ICBM은 싱가포르를 사정권에 넣고 있다. 또한 독립 초기부터 [[리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공산국가처럼 1당 독재로 국가가 직접 기획/통제하는 '사회주의식 자본주의'를 창안했고, 국방 쪽에선 자신들을 지킬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과 별개로 공산당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서 공산주의자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미국]], [[영국]], [[서유럽]] 등 다양한 국가들로 부터 무기를 수입했고, '적으로 둘러싸인 소국'이라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로부터 무기 구입 및 군사 자문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영국군]] 기지를 반환받으면서도 동시에 셈바왕 쪽 기지 임대 연장을 허용했고, [[미군]] [[해외 주둔 미군|주둔 기지]] 설립을 허용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이 인종 간 갈등에서 시작된 것을 반성하여 신생 싱가포르의 인종 갈등 문제를 없애는 것에 주력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70%라 공공연하게 중국계를 우선하거나 [[중화권]] 문화를 밀어줄 경우 자칫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어 의도적으로 중국 문화를 배제하고 다인종 다민족이 공존하는 싱가포르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화합으로 보이나 실은 안 보이는데선 차별이 존재한다.] 헌법상 국어를 [[말레이어]]로 지정하고 [[할랄 푸드]] 인증을 적극 추진해서 원주민 [[말레이인]]을 존중해주는 한편 인종 간 소통을 위해 제1언어로 [[영어]]를 지정했고,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언어 통합을 위해 [[표준중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간체자]]를 도입하는 등 중국계 언어 통합에도 노력을 가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들의 모어는 [[광동어]], [[객가어]], [[민어(언어)|민어]] 등이고, 이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오늘날 [[중국계 싱가포르인]] 내에서는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 [[표준중국어|중국어]]를 쓴다.] 그리고 인종이 모두 모이는 교외 각 지역의 HDB[* 그 전까지 인종 별로 주거지가 철저히 나뉘었다. 중국계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되 주로 [[차이나타운]]과 티옹바루, 탄종파가 일대 및 동부 지역인 겔랑, 카통 등에서 주로 살았고 말레이인 및 인도계는 리틀 인디아와 부기스에 주로 살았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독립 전까지 접촉조차 적었고 서로 소 닭 보듯 했을 정도로 따로 놀았다. 이래서야 인종문제가 재현될 것이 뻔해서 리콴유가 사회 통합책을 내놓게 되는데 그게 HDB로 인종들이 서로 같은 아파트에서 섞이게 만들고 주거난도 해결할 목적이었다.]를 통해 [[중국계 싱가포르인]], [[인도계 싱가포르인]], [[말레이인]]의 [[다문화주의|화합]]을 자연스럽게 추구했다. [[영어]]로 소통하고 HDB에 같이 살고 호커스에서 같이 식사하고 학교에서도 친구로 만나며 세 민족은 자연스럽게 이웃사촌으로 친구로 융합되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엄격한 법 집행을 실시해서 혐오 표현을 검열하고 [[싱가포르 여권|여권]] 등 [[신분증]]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하며 공립학교 교사도 각 인종을 1대 1대 1로 배분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인종 및 민족 간 통합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싱가포르/정치|싱가포르 내각]]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미푸트라 정책]] 탓에 인종 갈등이 극심하고 극우주의자가 판치며 혐오 표현이 난무하는 옛 모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등 갈등으로 몸살을 앓은 이웃 [[인도네시아]], [[민다나오]] 내 [[무슬림]]을 품지 못해 골칫거리가 된 [[필리핀]] 등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은 성과이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주변국에 비해 소국임을 인식하여 중국계 인구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중화권]]이 아닌 [[동남아시아]]의 일부'''임을 주변 국가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신뢰를 쌓게 된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영국]], [[미국]] 등 [[영미권|영어권]]과도 더 밀착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싱가포르는 [[중국]]과의 거리를 두기 위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까지 일부러 수교를 맺지 않았다. 비록 중국과 싱가포르는 거리를 두었지만 [[중국]]도 싱가포르의 상황을 이해해서 이에 대해 무리한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선발주자인 [[영국]], [[대만]], [[홍콩]], [[일본]], [[호주]] 등은 물론 현재는 싱가포르로 노동력을 송출하는 [[태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처지였다. 싱가포르 관광지인 주롱 새공원[* Jurong Bird Park]에 가면 [[모노레일]]에 [[타이항공]] 로고가 대놓고 있는데 이때 모노레일을 놔준 나라가 태국이어서 그렇다. 현재도 태국 정부는 양국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이 모노레일을 예로 들며 뿌듯해한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라만의 말처럼 말레이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바람이 사그라들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인도네시아에 수카르노에 비해 비교적 친서방적인 독재자 [[수하르토]]가 들어서면서 동남아 정세가 싱가포르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 큰 위협 없이 살아남게 된다.[* 사실 리콴유 본인은 수카르노보다 수하르토를 더 좋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근거없는 독재, 부패가 주변국인 싱가포르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카르노의 몰락의 배경에 미국이 있고, 수하르토는 수카르노와는 달리 반서방적이지는 않아 싱가포르의 국가 존립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한편 싱가포르는 독립하면서 [[도시국가]]가 되어버려서 [[리콴유]]의 급진적인 정책들이 바로바로 효과를 발휘하는데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런 정책이 먹혀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민에 대한 독재 수준의 통제가 필요한데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기 때문에 통제가 쉬워져서 오히려 리콴유 일가의 지배 하에 급속도로 사회를 통합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독립 후에는 말레이시아와 [[페드라 브랑카 분쟁]]이라는 영토분쟁을 치른 바 있다. 섬의 실효지배 문제나 [[ICJ]]에서 영토 분쟁 판결이 난 사례 등으로 인해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참고된다. 이 섬은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를 정복할 무렵 같이 정복한 무인도로 페드라 블랑카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인데 조호르 쪽에 붙어 있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뒤 문제가 되었고 한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해군이 대치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싱가포르의 실효지배가 인정되었다. 이 섬의 싱가포르 영유권이 인정된 이후 [[스페인]] - [[모로코]] 사이에서 [[2005년]] 페레힐 섬 문제가 터지면서 이 문제에서 또 한번 이 섬이 언급되었다. 독도 문제와도 관련있는데 실효지배가 인정받은 케이스라 일본이 이 판결을 매우 불쾌해하기도 했다. [[1990년]]에 [[리콴유]] 총리는 [[고촉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 노릇을 했고, [[2004년]]부터 [[리콴유]] 전 총리의 아들 [[리셴룽]]이 취임하여 2세 통치가 시작됐다. [[리셴룽]] 이후 총리로는 [[헹스위킷]], 로렌스 웡 등이 거론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