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싱가포르 (문단 편집) === 영국의 도래 === 그러나 1819년 [[동인도 회사]]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 경이 1,000명밖에 안 사는 깡촌 센토사섬에 조호 왕자 한 명을 왕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영국]]의 영향 아래에 집어넣어 버린다. 래플스는 이후 4년 동안 싱가포르를 오지에서 어엿한 항구도시로 개발했고, 이를 계기로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무역항으로서 싱가포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래플스는 리콴유 초대 총리와 함께 싱가포르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싱가포르에 처음 상륙한 지점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상이 세워져 있고,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수 있는 래플스(raffles)라는 이름은 이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 싱가포르는 [[해협식민지]]의 일원으로서 [[페낭]], [[말라카]]와 함께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주요 거점이자 중국인 인구가 많은 곳이 되었다. 이후 자유무역을 선언하고 화교를 탄압한 [[네덜란드]]와 달리 비교적 평등한 대우를 한 결과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덕에 지위도 [[동인도 회사]] 아래의 식민지에서 [[대영제국]]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상승하면서 제국의 엘리트 관료들과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적수가 없던 [[대영제국]] 해군의 비호 또한 얻게 된다. 이 섬은 [[홍콩]], [[캐나다]], [[인도]],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도 연결시켜 [[영국군]]의 동남아시아 최고 거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 개발을 위해 싼 임금으로 청나라 사람들을 대거 고용하며 이주시켰고, 청나라 상인들도 돈벌이를 위해 이민을 가면서 원주민보다 중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같은 시기 인도인 죄수들도 도시 개발을 위해 징발되면서 이들도 소수라고는 하지만 꽤 많은 숫자가 같이 정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각자의 핏줄임을 자각했기에 타 [[동남아시아]] 식민지와 달리 싱가포르 내엔 민족주의가 싹트지 않았다. 이 당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영국과 손잡은 반면 [[인도계 싱가포르인]]의 경우는 반영 사상이 짙었다. [[말레이인]]은 중립적이라서 영국 식민정부에 많이 협조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이 일본에 패배하면서 이 지역은 일본에게 [[일본령 싱가포르|점령]]당하여 [[화교]]들은 [[일본군]]에게 학살당했고, 특별 세금까지 물게 되면서 화교들은 일제에 반감을 드러냈다.[* 싱가포르 교육 과정에서는 [[일본의 전쟁범죄]]는 주요 주제로 다룬다. 당장 [[리콴유]] 세대에서는 친척이 부당하게 폭행당한 경험이나 학살당한 경험이 있다. 과거 [[리콴유]] 총리는 일본의 재무장 시도를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 들어간 초콜릿을 먹게 하는 것과 같다.'''"고 무려 정신이상자(...)에 비유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