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싱가포르 (문단 편집) === 탈식민 시기 === 종전 후 시간이 지나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싱가포르 또한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의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말레이인]]이 다수인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 싱가포르인|중국인]]이 경제 권력을 쥐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중국계 싱가포르인|중국인]]이 대다수인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 싱가포르는 인구 자체는 적지만 섬 하나뿐이라 나름 인구밀도가 높아서[* 물론 인구가 500만 명 정도 수준이라 인구밀도가 체감되지는 않는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합치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화교]]의 인구 수가 말레이인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사실 싱가포르만 그런게 아니라 싱가포르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화교]] 비중이 더 높은 [[페낭]]이나 [[이포]] 등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들도 있었고 당장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부터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인]] 인구가 많았으며 그 외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중국인]]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어 더욱 그랬다. 또한 식민지 시절 [[대영제국]]이 말레이시아를 싱가포르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앙금이 크게 남아 있었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대국들이 많은 [[동남아시아]]에서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말레이시아|말레이시아 연방]]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으며, 말레이시아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나가던 공산화에 두려움을 느꼈고 [[1948년]]에 말레이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싱가포르에도 예외 없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공산당 활동을 아예 막았다. 다른 한편 [[1955년]]에는 [[영국]]이 조건부 자치를 승인했고 [[1959년]]에 인민행동당이 창당됐다. 하지만 합병 이후 말레이계 우대 정책에 대한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고, [[리콴유]] 싱가포르 주 총리와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당시 집권당으로 현재도 집권 중이다. 사회주의 삘 나는 이름과 달리 반공 성향 우익정당이며 되려 이 당은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씨를 말렸다.]은 '말레이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종이 말레이시아인이다'는 주장을 하며 연방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이들은 심지어 [[말레이인]]들의 지지 또한 얻기 시작하였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이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합병할 때부터 인민행동당이 연방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싱가포르 내에서만 정치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당시 말레이인들의 생각은 '''[[중국인]]은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교육 수준이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 보다 좋은 경우가 많다. 미국, 영국, 유럽, 남아메리카 등에서도 동아시아계는 학습열이 높기로 유명한 것을 보면 동아시아인들의 특징인데 당연하지만 절대로 나쁜 게 아니다. 그만큼 동아시아인들이 근면성실하고 똑똑하다는 얘기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와 [[말레이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한다면 곧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고, [[말레이인]]은 낙오될 것이라는 것이 말레이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공포감이었다.[* 이는 실제로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화교]]가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지역조차 경제는 화교의 수중에 있다. 오히려 경제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기에 견제 차원에서 탄압이 가해지는 측면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 동지였지만 합병 이후에는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시아/정치|말레이시아의 정치]]를 장악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와 사적으로는 친하지만 공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즉 연방으로 받아준 싱가포르의 [[중국계 싱가포르인|화교]]들이 오히려 말레이시아 정부를 장악하여 [[말레이인]]을 위한 정책이 아닌 [[중국계 말레이시아인|화교]] 또는 [[마오쩌둥주의]]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까봐 두려워했다. 반면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의 [[부미푸트라|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이해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정치인들의 정책은 인종 갈등만 야기시키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런 정치적, 인종적 갈등이 계속되던 와중 결국 싱가포르에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1964년 7월 21일 2만 5천여명, 212개 단체의 [[말레이인|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 싱가포르인|중국계]]와 충돌한 것이다. [[리콴유]]는 이에 빠르게 중앙 정부에 진압병력을 요청하고 야간 통금을 시행하여 대응했다. 사건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압둘 라작|라작]] 부총리와 [[리콴유]]는 외부 세력이 개입했으며 배후에 [[인도네시아]]와 중국계 공산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던 11일간 지속된 시위로 건물 수백채가 불타고 36명이 사망하였으며,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9월엔 [[중국계 싱가포르인|중국계]]가 주로 주거하는 지역에서 삼륜차를 몰던 [[말레이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자 또 다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하여 13명이 죽고 103명이 다쳤다. 인종 갈등이 결국 극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에 [[툰쿠 압둘 라만|라만]]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하나는 강경파인 [[리콴유]]를 구속하여 제거한 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을 싱가포르에 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툰쿠 압둘 라만|라만]]은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툰쿠 압둘 라만|라만]]은 먼저 [[리콴유]]에게 "우리가 [[말레이시아|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관계|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싱가포르에게 연방 의회의 의석을 포기한다면 국방과 외교 분야를 제외한 완벽한 자치를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리콴유]]는 이 제안을 고려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가 연방에 잔류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리콴유와 그의 정부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여 분리 독립하기로 한다. [[1965년]] 중순에 이르자 완벽한 독립으로 마음을 굳힌 [[리콴유]]는 마찬가지로 연방 잔류에 회의적이었던 오른팔인 고켕스위(吳慶瑞, Goh Keng Swee)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압둘 라작|라작]] 부총리와의 회담장으로 보낸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분리 독립에 동의하고, 분리독립 계획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일어날 소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밀을 유지하고 기습적으로 독립을 발표할 방법까지 전부 합의했는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독립에 합의하고서는 마치 싱가포르가 일방적으로 분리독립을 "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하였다.[* 싱가포르가 이 시점에 말레이 연방에 잔류할 수는 '''없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다가는 다른 지역들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될 뿐이었다. 리콴유가 독립을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고, 도시국가가 아주 불리한 여건임을 알고 있었지만, 불가피하게 홀로서기를 택한 것이다.] 양측의 합의대로 1965년 8월 7일에 [[툰쿠 압둘 라만|라만]]은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을 불러 일방적으로 추방을 선포하였고,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는 싱가포르를 축출하는 법안인 헌법 개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날에 [[리콴유]]는 눈물을 흘리며 독립을 선언하는 모습을 연출하였고, 싱가포르는 자주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이렇듯 널리 알려진 대로 [[중국계 싱가포르인|중국계]] 인구가 많은 싱가포르가 먼저 독립을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싱가포르 역시 뜬금없이 '독립당한' 것은 아니었다.[* [[https://www.straitstimes.com/opinion/secret-documents-reveal-extent-of-negotiations-for-separation|#]]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에서 독립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기밀에 붙여져 있다가 2015년에 싱가포르 측의 당시 문서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그 전에는 싱가포르 내에서도 '싱가포르는 일방적으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연방이 와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끝까지 [[툰쿠 압둘 라만|라만]]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싱가포르가 축출되면서 영국 정치인들은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을 대환영하였다. 당시 말레이시아와 갈등을 벌이던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 섬 북부의 [[사라왁]]과 [[사바 주|사바]]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 자체를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저 둘은 결국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똑같이 희망하던 [[브루나이]]는 술탄의 권력 문제로 끝내 말레이 연방 가입을 거부하고 [[1984년]]에 독립국으로 홀로서기에 나선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연방 자체를 영국 신식민주의라고 정의내리고 있었으며, 특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공공연하게 반서방 성향을 드러내며 사라왁, 사바에 민병대를 보내고 싱가포르에 군사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라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축출이 [[인도네시아]]의 승리, [[말레이시아]]의 패배라고 생각하며 좌절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는 영국에서 평화적으로 독립해서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며 독립을 이뤄냈기에 반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나중에 싱가포르 입장에선 터닝포인트가 될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