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티 (문단 편집) ==== 미국의 점령 ====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하게 된다. 미국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구실로 [[미합중국 해병대]]를 파견하여 점령했다. 이 때 미 해군 항공대는 항공지원을 명목으로 게임하듯 아이티인들을 기총으로 쏴죽였고 수많은 사람이 미 해병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전쟁의 구실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 가능성이지만 이것은 미국 정치가들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아이티는 수십년째 문제없이 채무상환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월가의 은행가들이 아이티의 정치혼란을 이유로 채무불이행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여러 이유가 섞여있었다. 1910년에 미국 자본은 프랑스로부터 아이티 국립 은행을 인수하고 아이티의 빚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이를 통해 아이티의 세관을 운영하여 관세를 차지하려 하는 등 아이티의 주권사항을 위협했다. 이에 대해 아이티 정부가 거부하자 월가 등의 미국 자본이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주장하며 미국 정부를 설득했다. 미국 정부로써도 자국의 안보를 위해 다수의 이주민들을 내세워서 아이티에서 프랑스 이상의 영향력을 펼쳐나가고 있던 [[독일 제국|독일]]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1차 대전]]으로 인해 아이티에 깊은 이해관계가 있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이티 문제에 개입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요소가 맞물려서 대서양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국 기업가들의 이익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보고 침공한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이었다. 미국은 [[멕시코 혁명]] 간섭과 아이티 침공 등을 마무리한 뒤에야 1차 대전에 참전했다.] 이렇게 건국 후 한 세기 반 가까이를 빚쟁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 통치를 펼쳤다. 아이티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아이티를 점령한 미국은 아이티 정부에 추가적으로 미국 금융자본으로부터 대규모의 대출을 받을 것을 강요했다. 이 새로운 대출금은 미국 금융자본의 이득으로 흘러들어갔으며, 이 대출상환은 미국의 점령이 끝난 뒤로부터 10년이 더 넘게 지난 1947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아이티의 현황에 대한 UN보고에 따르면 인구의 90%가 기아수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아이티는 군부의 입김이 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나마 미국도 인프라를 깔고 직업학교를 세우면서 산업화를 진행하는 등 나름의 신경은 썼지만 아이티 전체의 이득은 결코 아니었다. 인프라와 산업화의 대부분은 도시에 집중되었으며 그 과실은 미국인들이 우대한 소수의 혼혈 엘리트들의 것이었다.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은 오히려 총칼로 위협받으며 도로건설을 위한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갔으며, 기아와 싸우며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 했다. 이 때 생긴 갈등으로 인해 재독립 이후의 아이티가 [[쿠데타]]와 군부 독재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도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붕괴되어 사실상 나라 자체가 최빈국으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