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EOgvtUyfhY)]}}}||{{{#!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tzCSo_qwk4)]}}}||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러라. >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세는 나이를 사용해서 32세가 나왔다.] >---- >한국통사(韓國痛史)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주의|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아시아주의자]].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字)이기도 하다.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한다. [[가톨릭]] [[세례명]]은 [[사도 토마스|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성 토마스를 종도 성 도마로 [[음차]]했기 때문. 현재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마라고 호칭한다. 한자로는 多默이라고 표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