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치대 (문단 편집) == 생애 == 1918년 8월 7일 경상북도 경산군 진량면(현 경산시 진량읍) 봉회리에서 아버지 안상열(安祥烈, 1890. 5. 9 ~ 1955. 7. 19)과 어머니 [[안동 김씨]](1894. 1. 20 ~ 1945. 7. 29)[* 김청근(金淸根)의 딸이다.]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본 제국|일제]]의 탄압에 끝내 굴복해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전국 각지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를 따라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이에 안치대는 장로로 있으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측의 결정을 거부하고 평사교회·상림교회·봉회교회 소속의 목사와 신도들과 일치 단결하여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출애굽기]] 20장 3절의 성경 구절을 앞세우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이들 교회를 폐쇄시키기 위해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김선암 등을 비롯한 신도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급기야 교회 강대상 안에 '조천기도회 강령'이란 제목 하에 조선독립만세·일본타도·영미만세·비밀엄수 등의 글을 써놓은 뒤 이러한 문구가 이들 교회의 신도들이 쓴 것으로 몰아붙이는 간교한 계책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 1943년 11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도들을 체포했고, 안치대 또한 이때 체포되었다. 그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약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1월 1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2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1414&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86년 1월 3일 별세했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순흥 안씨]][[분류:경산시 출신 인물]][[분류:1918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건국포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