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시장 (문단 편집) ==== [[북한]]에서 ==== 북한식 경제 체계에 의하면 시장은 '시장 경제에 기반한 체계'로서 북한이 추구하는 [[주체사상]]식 경제와는 방향이 달랐다. 하지만 전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이후 인민의 수요와 경제 재건 속도가 일치하지 않아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영상점만으로는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스탈린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국가 주도 하의 공업 발전을 사회주의 경제 혁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이에 따라 중공업은 쑥쑥 발전한 반면, 인민의 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제품이나 농산물은 다소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이나 동유럽에 자원을 퍼주고 식량과 경공업 제품을 얻어오는 "형제 교역"이 있었으나 이것은 1950년대 후반 이후의 이야기인데다,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기에는 국가 주도의 유통망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지역 유지들이 인민위원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어서, 유통망과 자원 분배가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권이 처음에 수립될 때부터 완전한 통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아니고, [[김일성]] 수령 유일 체제로 이행하면서 서서히 독재정권으로 이행한 것이다. 북한도 초기에는 지역에 따라 투표로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사회주의식 집산주의로 갈 것인지, 중앙 정부와 협조하여 무상몰수 내지 무상분배한 토지에서 각자 알아서 생산물을 조합 형식으로 공동 관리를 할 것인지, 사회주의적 개혁보다는 봉건적 잔재 청산이 시급하므로 일단 구시대적 농업 구조부터 개혁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힘으로 모든 지역의 물자 부족 상황을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따라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의 생산품 교환이 물물 거래는 막을 수가 없었고 지나치게 급격한 개혁은 인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므로 1950년대부터 북한 정부는 농민시장을 허용하기에 이르나, 3일, 5일에 한 번씩 열던 것을 10일마다 열게 하며 직업적인 상거래나 매점매석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고 각자 할당량을 채운 뒤 남는 물건을 필요에 따라 교환하거나 거래할 수 있도록만 허용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적인 시장이 국가 배급망의 부족분을 채워주기 시작하면서, 북한 정부는 이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1969년 김일성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질서가 일부 있을 수도 있다' 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시장의 필요성을 인정해버리면서 공공연히 굴러가고는 있으나,[* 당시 북한 정부에 있던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은 소련처럼 완전한 국가 통제 하에서 상업을 통제하길 원했다고 한다.] 여전히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서 대대적으로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8.3 인민소비품|공장에서 생산하고 남은 자투리로 만든 물품]]을 팔아도 좋다는 식으로 더 넓게 허용되더니 개개인이 상업 활동이나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해놓은 합영법이 등장하게 되고, 1990년대에는 매일장으로 완전히 허용되기에 이른다. 아무튼 북한식 경제 체제의 관점에서 분석하자면 북한은 전 국가 단위로 일정하게 암시장이 돌고 있는 국가라고 봐도 좋은데, 시장 자체는 국가에서 허용했지만 거래가 금지된 품목들도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