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류왕 (문단 편집) == 여담 == 《[[속일본기]]》에서는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30_0070|지난날 고려 왕 고무(高武)가 일본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고무가 영류왕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는데, 해당 기록에 의하면 '조정의 위엄을 빌리기 위해 형제 관계를 맺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라고 일본 측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인데다가 [[일본서기|평범한 외교행위도 볼모라거나 조공이라고 왜곡하는 등]] 일본 역사서 특유의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영류왕 때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따로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25년 승려 혜윤을, 630년 대사 연자발(宴子拔)과 소사 약덕(若德) 등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이 사신들이 일본에 파견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파견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속일본기》의 기록과 종합하면 영류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예상하고 대비하기 위해 외교를 다각화한 시도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영류왕이 아니라 '고씨지세'(高氏之世) 부분에 주목해 보장왕 말년에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던 제3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일본에 저자세로 지원군을 요청한 기록이 남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로 태자 [[고환권]](高桓權)이 있었는데, 영류왕 23년(640년) 2월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신찬성씨록》에서 [[고복덕]]이 영류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상반된 기록도 가지고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