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친왕 (문단 편집) ==== 제정복고 시도 연루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2.07.16 왕정복고당 검거.jpg|width=100%]]}}} || || {{{#gold '''1952년 7월 16일 자 《경향신문》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71600329202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7-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851&publishType=00020|{{{#gold '''왕정복구를 몽상, 일당 8명을 검거 문초 중.'''}}}]]'''}}} || 그런데 [[6.25 전쟁]] 중 '''실제로 [[제정복고]]를 꿈꾸며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이유립]]. 《[[환단고기]]》의 그 사람 맞다.(...) 1952년 7월 12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유립은 [[청주대학교|청주대학]] 상과 대학 학생 이용하와 함께 1951년 8월 경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정부|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같은 해 9월 초에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은밀하게 회원들을 모집했고, '불구레문화사'란 간판을 내걸어 위장한 다음, [[일본]]에 있던 영친왕을 국가 수령(원수)으로 모시기로 했다. 국명은 대달(大達), 국가는 신가(神歌), [[연호]]는 개벽(開闢), [[국화(상징)|국화]](國花)는 [[진달래]]로 정했다. 그리고 [[국기]]는 [[태극기]]에서 사괘를 뺀 뒤 중앙에 연한 검은색 원을 둔 황색 바탕의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 다음에 영친왕에게 보낼 문서를 이용하를 시켜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구포(龜浦)에 피난와있던 [[순정효황후]]에게 전달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다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원(정보팀 형사)이 이를 적발하여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이유립]], 이용하를 포함하여 노동당원 노봉우, 통관업자 홍성도, 사주업자인 이석영, [[한국독립당]] 대전시책인 박헌철 등 일당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넘겨져 수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5년 뒤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비록 영친왕이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사건까지 벌어지자 [[이승만 정부]]는 그 사건 이후 영친왕을 더욱 경계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을 경험한 중년 이상 노인층들이 많았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