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정설 (문단 편집) == 가톨릭의 은총논쟁 == 사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관심 대상은 비슷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 역시도 개신교의 예정설 논쟁과 비슷한 논쟁이 있어왔다. 이를 은총논쟁이라 한다. 전술했다시피 [[아우구스티노]]는 펠리기우스의 행위 구원론을 디스했다. 이 후 이 논쟁은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중세에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우선 [[베네딕토회]]의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는 극단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주장하다가 라바노 마우로(Rabanus Maurus)의 비판을 받았고, 아벨라르도(Aberlardus)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를 고집하다 베르나르도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사실 이중예정설은 이미 가톨릭에서 9세기 마인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848년에 당시 아우구스티노를 연구하던 신학자 고트샬크(Gottschalk; 810?~869)가 예정에 대해 쓴 글이 그의 전 수도원장 라바누스 마우루스를 격분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이단으로 판명되어 초주검이 되도록 매질을 당했다. 그 이후에 그는 오빌레르 수도원에 감금당했으며 그는 그곳에서 정신착란을 일으켜 868년에 죽을 때까지 풀려나오지 못했다.(출처 『기사도의 시대』 中) 또한, 로마서의 이러한 내용은 은총을 외부에서 주입시키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아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성서에서 반박하는 구절도 숱하게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노를 옹호했고 드디어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노 주의의 승리로 끝나는듯 했으나, [[종교개혁|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럽 대륙에서 개신교가 출현하면서 이 논쟁은 재점화되었고, 상기했다시피 루터와 칼뱅이 이 문제를 건드리면서, 이들과 주로 논쟁을 벌이던 가톨릭 신학자들 역시도 이 문제를 건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톨릭 안에서도 2개의 [[수도회]]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주장이 나오게 된다. 공교롭게도 첫번째 수도회는 이단에 대한 논박과 설교가 주특기이며 최고 수준의 신학자들이 모인 [[도미니코회]]였고 2번째 수도회는 對 개신교 특수부대(…)이자 떠오르는 신학의 신성 [[예수회]]였다. 몰리나(Lo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와 동의를 통하여 초월자의 '철회되지 않는' 절대적 은총이 약속된다고 하였다. 몰리나가 이 주장을 하자, 바네즈(Domingo Banez, 1528~1604)를 대표로 한 [[도미니코회]]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도미니코회는 "너희들 펠라기우스?"라고 비판하였고, 이에 맞서서 [[예수회]]는 도미니코회보고 "당신들은 칼뱅스럽네?"라고 반박하였다. 이 두 [[수도회]]의 격렬한 논쟁에는 다른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주교]]들까지 개입하여 토론하였고 결국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은총의 도움 회의>를 소집하여 결론을 내려 했다. 그러나 1598년부터 1607년까지 이 회의는 거듭 소집되었음에도 이렇다할 결론은 내지 못했고, 결국 교황 [[바오로 5세]]가 "앞으로 교황 동의 없이는 이 떡밥으로 저서 출판 금지"라고 선언하여 이 논쟁은 일단 멈추게 된다. ~~역시 [[편집제한]]이 최고다~~ 다만 토론이 흐지부지 되긴 했어도, 이후 가톨릭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잠정적인 결론 정도는 어느 정도 나왔다. 우선 은총논쟁에 있어서 극단적인 해석법을 피할 것.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초월자의 은총을 단지 '인간 자유의 결과물'로 떨어트리거나, 혹은 은총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의 구원이 모조리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기계적 결정론으로 빠지지 말자는 암묵적 결론이 나왔다. ~~감정이 가라앉고 [[편집제한]]이 풀린~~ 현대 가톨릭에서의 공식 입장은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구원을 받지만 이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가 뒤따라야 하며, 이 하느님의 은총은 __모든 사람에게__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것에서 대부분이 합의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의 그 의화(justification) 교리이다.] '''다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가톨릭 의화교리의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의 자유의지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의화 교리를 깔 때 가장 자주 쓰는 래퍼토리가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는 말장난이다. 의화교리에서의 자유의지는 절대로 하느님의 선재은총과 동등한 위치가 아니다. 하느님 은총이 선재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여담으로 이 논쟁의 두 축인 [[도미니코회]]와 [[예수회]]는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 쌍벽을 이룬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라이벌 관계의 싹수가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논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조상 제사 문제와 Deus(하느님)의 번역 문제를 두고 예수회와 도미니코회는 또 충돌한다. 이를 중국의례논쟁이라 하는데, 이 부분은 [[천주]] 항목을 참고해 보자. 개신교 설교에서 간간히 나오는 '우리는 하느님 선택을 받아 이곳에 나와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가 바로 예정설에 근거한다. 하지만 위에 쭉 설명한 바와 같이 예정설은 개신교에서만 발달한 것이 아니다. 이에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루뱅(Louvain)학파' 내지는 '얀센주의(Jansenism)'는 장로교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은총론, 구원론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사실 자세히 따져보면 장로교식 은총론이라 보기는 힘들고 문제의식은 루터&칼뱅적으로 그에 대한 해결은 펠라기우스적으로 한 짬뽕 주장에 가깝다. 아래 김회중 대주교의 설명글 참조.] 물론 이는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얄짤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다만 이 문제는 순수 신학적인 면은 아니었다. 가톨릭 국가 프랑스는 물론이고 네덜란드 쪽에 영토를 가진 오스트리아에도 얀센주의가 많이 퍼졌고, 얀센주의자들은 예수회가 얀센주의를 곡해하여 비방했다고 반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예수회가 축출되고, 일시적으로 교황청은 예수회를 해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얀세니즘 파의 정치적 전략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에 얀세니즘적 엄격주의와 근본주의 풍조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84147|김희중 대주교의 얀세니즘에 관한 칼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