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자서 (문단 편집) === [[복수#s-1|복수]] === 고생 끝에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나름대로 환대를 받았다. 초나라의 명문이던 '오'씨 가문의 명성은 신생국가인 오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심지어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자서가 초나라에 도주한뒤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음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나라는 이런 오자서를 환영했으나 오자서는 이 환영을 순수히 즐기지 않고 한동안은 승을 보살피며 조용히 농사일을 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인내의 끝에 오자서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다름이 아니고 우연이 겹친 끝에 '''오나라에 왕위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오나라 선선선대 군주 [[수몽]] 재위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몽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며 딱히 누구를 찬밥취급하진 않았으나, 재능이 뛰어난 넷째 '계찰'을 유독 총애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기를 바랬고 계찰의 세 형들도 권력욕이 약했는지 아니면 계찰을 그만큼 아끼고 인정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수몽의 뜻에 일심동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정작 계찰은 나이도 어리고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거절했고,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맏형인 [[제번]]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제번과 둘째인 [[여제(오나라)|여제]], 셋째인 [[여매]] 모두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며 어떻게든 계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계찰은 제번, 여제, 여매까지 차례로 죽어버린 뒤에도[* 전쟁통이라 다들 그리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 끝끝내 왕이 되길 거절했고 결국 셋째인 여매의 아들 [[오왕 료|료]]가 왕위를 승계한다. 수몽의 장남 제번의 아들이자 후일 [[합려]]라 불리게 될 광은 당연히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숨겼다. 그러나 오자서는 이런 광의 본심을 꿰뜷어 봤고, 야심가인데다가 능력은 확실하나 입지가 불확실한 그를 지원하는게 자신의 복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거라 여겨 그의 측근으로 들어가 그를 보좌하며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쿠데타의 자세한 내막은 [[어장]] 문서 참조.] 스스로 왕위에 오른 광은 자신을 오왕 [[합려]](闔閭)라 칭하게 되었고 당연히 최대 공신인 오자서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서 측근으로 삼았다.[* 이 와중에 사실상 이 왕권분쟁의 발단이 된 계찰은 내란이 터질때 아무 진영도 편들지 않고 그대로 외국으로 튀었다가 내란이 끝난 뒤 귀국해, 합려의 즉위의 합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죽은 료의 무덤을 찾아가 곡을 하는 극도의 처세술을 발휘했다.] 이리하여 화려하게 재상 자리에 취임한 오자서는 본격적으로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오나라는 이민족의 나라라 할지언정 상당한 위세를 자랑하며 성장하던 유망주였고 거기에 중원에서 이름 높은 오자서까지 전면에 나서며 각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왔다. 이 중에서 특히 유명한 두명이 훗날 '''손자병법'''을 만들며 현재까지 최고의 군략가로 꼽히는 [[손무]]와 내정의 명인인 [[백비]][* 오자서와 비슷한 처지로, 초나라의 중신인 백주리의 손자였으나 비무기의 참소로 조부를 포함한 일가가 몰살당하고 혼자 오나라로 도망쳐왔다. 이때 [[관상]]을 볼 줄 알던 피이라는 사람이 백비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으나 오자서는 [[동병상련]]을 내세워 듣지 않았다.]였다. 오나라는 이런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급속도로 성장을 거듭해 수년 만에 초나라와 겨룰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기원전 506년, 손무와 오자서가 함께 이끄는 오군이 주변 동맹국의 군과 함께 초나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쾌진격 앞에 초군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고, 영윤 [[낭와]]와 사마 심윤술([[심제량]]의 아버지)이 이끄는 초군은 백거 전투에서 크게 패해 불과 3개월 만에 [[수도(행정구역)|수도]] 코 앞까지 적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초의 수도는 초 문왕 시대에 건설되어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영(郢)이었으나 손무의 수공(水攻)에 허무하게 함락(정사가 아닌 [[열국지]]의 내용), 왕과 몇몇 대신들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수도에 오군이 입성한 이후에 대규모의 [[방화]]·[[약탈]]·[[강간]]이 이루어졌다. 매우 아이러니한 것은 손무는《[[손자병법]]》에서 민심을 얻는 것을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이 참전한 전쟁에서는 학살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학살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 때문에 전쟁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만다. 이것은 그만큼 오자서의 집념이 손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묘사된 [[굴묘편시]].''' [[파일:굴묘편시.jpg]] || 한편 이때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였다.[* 연전연패로 초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영윤 [[낭와]]는 비무기를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이때 백성들이 좋아하면서 침을 뱉었다고 나온 바 있다.] 평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자서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지만 오자서는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고, 영성을 함락시킨 뒤 평왕의 능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 [[구리(원소)|구리]] [[채찍]]으로 수백 대[* 《사기》 <오자서 열전>에는 300대로 기록되어 있다.]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십팔사략]]》에서는 평왕의 시체가 [[수은]]을 칠해서 그다지 썩지 않았기에 오자서는 더 기뻐하며 두 눈을 후벼파고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가족을 잃은 지 16년 만에 이룬 복수였다. 이때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오자서가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인간된 도리로써 차마 못 할 짓이 아니오!'라고 호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다([[도행역시]])'라고 답변했다. 즉, '어차피 오나라 국력만으로는 초나라를 그리 오래 점령 못하니까, 지금은 비록 잔혹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놓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吳)도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몰래 탈출한 [[초소왕|초 소왕]]을 대신해 [[공자 신]]은 일종의 [[분조]]를 이끌며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나라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고, 오자서에게 실망한 신포서도 서방의 강대국 [[진(영성)|진(秦)]]에 [[사신]]으로 가 원군을 얻어냈다.[* 이 때 신포서는 진나라에 가서 구원군을 애원했다. 하지만, [[진애공(영성)|진 애공]]은 "그 나라는 자업자득이다. 평왕이란 자부터가 아들의 아내를 빼앗고 벌인 일이다.(애당초 평왕이 취한 며느리가 '''진애공이 각별히 아꼈다고 알려진''' 누이다...늙은 평왕이 애공의 누이를 취한것도 단단히 분노할 일인데 평왕은 들키지 않겠다고 정비가 아닌 측실로 삼는 진나라 공실을 모욕하는 행위를 했다.) 망하던 말던, 괜히 내 나라 병사들 피를 흘리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러고는 다시 애원하던 신포서를 신하들을 시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에도 궁궐 문 앞에서 신포서는 1주일 동안 [[단식투쟁|먹지도 자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청하니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하던 진 애공도 신포서의 충심에 감격하여 "저런 충신이 있는 나라는 아직 망할 때가 아니다."며 군사를 내주었다고 한다. 또한 초 소왕은 바로 위에서 말했던 진 애공의 누이 맹영과 초 평왕의 아들, 즉 외조카였던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왕손 승(王孫勝)을 초나라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나라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나라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나라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고, 진(秦)·초 연합군과 오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손무는 이에 오나라로 회군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백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같은 생각이었던 오왕 합려도 백비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어 진·초 연합군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 명장 화련에게 된통당하고 손무가 파견한 전의 장군의 구조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러한 만만치 않은 대패의 결과로 합려의 동생이었던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 등 몇몇 장수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 부개의 모반을 평정하러 원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무의 뛰어난 전술, 전략으로 초나라를 대파하여 깨뜨렸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연승의 쾌진격과 그 단맛에 방심하고 손무의 진언을 어겨가며 과욕을 부리다 일을 말아먹고 끝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탓에, 작금의 초나라를 멸망시켜 오에 복속 혹은 왕손 승을 이용한 괴뢰국으로 재편하여 오의 속국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시킬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대승이라, 오는 결국 본토로 철수하기로 하는 대신 초가 막대한 재물을 오에게 매년 바치기로 한 조공의 약조와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일설로는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승은 초나라로 귀환한 뒤엔 나름 대우받으며 살았으나, 훗날 아버지인 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서라도 정나라를 쳐 복수를 완수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제량]]에게 저지당하자 자살하였다.[* 그러나 백공 승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승의 후손들은 진(秦)나라로 망명해 선조의 봉호를 따라 백(白)씨를 칭했는데, 200여 년 뒤 초나라의 수도 영성을 정복한 [[백기(전국시대)|백기]]가 그 후손 중 하나라고 한다(이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백거이]]). 초나라를 향한 오자서의 복수심이 먼훗날 진나라의 통일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