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진우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3월 9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일찍부터 항일 [[빨치산]] 활동에 참가하면서 김일성을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일본 육군]]의 항일 무장 단체들에 대한 토벌 활동이 강화되자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피난했고, [[소련군]]에 입대,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7071_30556.html|88여단]]에서 [[소련 육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당시에는 바쁜 김일성 부부를 대신해서 갓 태어난 [[김정일]]을 업어가며 키웠다고 하며, 이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김정일 치하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광복 후 북한으로 돌아와 1946년 9월에 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에 참가했고, 육군 장령이 되어 [[한국전쟁]] 중에는 제766유격연대[* 영화 [[포화속으로]]에서도 나온 바 있는 인민군 부대]장으로 부임해 [[경상북도]] [[포항시]]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국군의 격렬한 저항과 [[유엔군사령부|UN군]]의 압도적인 포화 공격에 큰 피해를 입어 연대는 궤멸되었고 전쟁에 투입된지 불과 2개월 만에 인민군 12사단에 합병당하는 수모를 겪고 만다. 이후 후방으로 좌천되어 [[김일성]] 경호부대의 대장을 역임하다가 휴전 이후인 1954년에는 3사단장에 부임하고 소장으로 집급한다. 1956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오르고 1957년에는 3군단장이 된다. 1958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한 뒤 공군사령부 참모장[* 육군 출신인 오진우가 공군사령부에 근무한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전세계 어느 나라나 공군 창설 초기에는 육군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다. 예를 들어, 미국도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분리한 게 1947년 이지만, 정작 공군사관학교는 1954년에야 생겼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육군 장교들을 충원하였다.], 총참모부 부참모장,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부상,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 등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쳤고,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북한)|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1917)|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9년 7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격되었고,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총정치국장 자리는 곧 안영환에게 물려주고 총참모장에만 집중하였고, 헝가리 외교문서에 따르면 비서국 비서로 보선되었다. 1969년 12월,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에 재선,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겸하며 군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총참모장 재직 중이던 1976년 5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현(북한)|최현]]의 뒤를 이어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됨으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오진우는 오직 김일성에게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만화 김정은에서는 오진우가 김일성 앞에서 유일하게 맞담배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서술했다.]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 김정일의 경우 자신이 보모 역할까지 하면서 길렀음에도 제대로 된 군 경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좀 더 군사적 능력이 있어 보이던 [[김평일]]에게 더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성산]]이 김성갑의 편의를 봐주었다고 철직당할 위기에 처하자 겨우 그거 가지고 철직을 하느냐고 유일하게 강성산 편을 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김정일이 처음에는 [[오극렬]]을 앞세워 오진우를 어떻게 실각시키보려 했지만 인민무력부를 철옹성같이 장악한 오진우를 몰아낼 수가 없었고, 결국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 오진우를 제거하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거액의 [[뇌물]]을 계속 건넸다.[* 김정일은 오진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 자주 그를 초대했는데, 어느 날 과음한 오진우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당시 김정일은 보고를 받고는 병원으로 즉각 달려 와서 의료진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치료할 것을 명령하고는 오진우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할시 큰 포상을 약속했고, 오진우를 후송한 교통 순찰관에게도 크게 포상을 주었다. 나중에는 오진우를 외국으로 보내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결국 김평일이 김정일의 정치 공작으로 권력을 잃은 뒤에는 친김정일 세력으로 돌아섰다. 이후 군부 내 보수 세력의 수장 역할을 하면서 [[오극렬]] 등 개혁 세력과 암암리에 권력 투쟁을 했는데, 1979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오극렬에게 총참모장 직책을 내주면서 일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최측근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빨치산 1세대였던 [[최현(북한)|최현]]과의 경쟁에서는 우위를 점했고, 1976년에 최현이 맡고 있던 인민무력부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정치력에서 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도왔고, 그 공으로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을 구실로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했다. 이후 자신의 최대 라이벌 중 한 사람이었던 오극렬이 [[정치장교|정치위원]]의 권한 축소에 관한 문제로 김일성의 신임을 잃고 총참모장 직책을 [[갑툭튀]]한 원로인 [[최광]]에게 내주자, 최광과 함께 개혁파의 위세를 압도하면서 보수적인 정치 군인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에는 [[최현(북한)|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 1987년 8월, [[박영순(1905)|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에 군부의 확실한 장악을 위해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자리를 ~~스틸~~가져가고 1991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입지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1992년 4월에 북한 군 역사상 단 세 명밖에 없었던 (오진우, 최광, 리을설) 인민군 [[원수(계급)|원수]]에 가장 먼저 진급하는 등 말년에 가서도 여전히 강한 권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2015년 11월에 마지막 인민군 원수였던 리을설이 사망한 뒤로도 이 계급에 오른 이는 한 동안 없었다가 2016년 4월 14일에 원로 차수들인 김영춘과 [[현철해]]가 동시에 진급했다.] 1992년 4월 24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 참가했으며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광진(1927)|김광진]]과 사열을 돌았다. 이후 김정일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만약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이후 김정일 시대에 [[조명록]]이 수행했던 역할을 이 양반이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그때가 70대 중반의 고령이긴 했다. 1991년 [[허담]]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광]], [[김철만]], [[전문섭]],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죽은 뒤에는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이 무렵부터 지병인 [[폐암]]이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김정일은 오진우를 특별히 [[프랑스]]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지만, 별다른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대개의 암 말기 환자가 그렇듯 검진했더니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까지 악화되어 있어서 그냥 되돌아 왔다고 한다. 백옥의 묘사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이듬해 평양에서 투병 중 사망했다. 죽기 전날 김정일이 최광을 비롯한 수뇌부를 이끌고 마지막 문병을 갔고, 장례는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행해졌고, 유해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혔다. 전장에서는 정통 야전 지휘관보다는 참모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그 솜씨도 그리 신통치 못해 [[나치 독일]] [[국방군]]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이나 소련 육군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같은 [[똥별]]들에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북한군 최고위급 대장이나 차수들은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야전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그냥 군 원로직으로 보면 되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대신 ~~후빨~~정치적 보신술은 [[만렙]] 수준이었는지 김일성 시절 행해진 수많은 [[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김정일 조차도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군인 보다는 전형적인 정치군인 타입의 인물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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