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타쿠 (문단 편집) === 2000년대 이전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digitalpicture&no=541607|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오타쿠성 일뽕에 대한 거친 고찰]] 과거 [[PC통신]] 또는 그 이전의 시절에는 "고급 문화" 혹은 뭔가 "신비한, 컬트적인 취미"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시절 일본 문화를 즐겼던 이들은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반 장난삼아 부르기도 했고, 그 호칭을 크게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일본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자체가 매우 희귀하고 별로 없는 취미였다. 1998년 일본문화 개방 이전에는 주로 부유한 집안인 대학생,사회초년들이나 일본 서브컬쳐에 몰두해 덕질할 수 있었다. 당시 서민들의 경우 일본 가기도 그렇고 한국에서 정품에서 일애니 굿즈,만화책,게임은 구하기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이러한 이유로 오히려 그 당시 덕후들은 오타쿠라고 불려도 오히려 좋아했지 싫어하지 않았다.] 또한 오타쿠의 뜻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었던 걸로 봐서 오타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무래도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지상파 방송 시대에는 TV에서 일본 만화가 방영되는 시간도 하루에 해봐야 2시간이 되지 않았고, 비디오방, 만화방, 오락실을 훑고 다녀도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만 방영되는 만화 프로그램이나, 드문 예외 상품을 구하려고 해도 부지런히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을 동원해서 온라인 인맥을 통해 정보를 찾아 다녀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활용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했다. 당시 도스 컴퓨터는 윈도우나 Mac OS와는 달리 키보드와 명령어 위주라 사용하기도 더 불편했다. 한국에서 제도권 매체가 오타쿠의 뜻과 어원을 파헤친 것은 2000년에 출간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이 거의 최초이다. 최초로 생소했던 오타쿠의 개념과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오타쿠 관련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은 1998년 김지룡의 《[[http://www.yes24.com/24/goods/1211?scode=032&OzSrank=35|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이다. 물론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타쿠에 관련된 항목은 위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오카다 토시오의 <오타쿠학 입문>을 짜깁기해서 붙여놓은 내용이다. 지금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과거 신문기사에서도 오타쿠 얘기가 좀 나오긴 했다. 또한 당시 정치 및 사회 상황 기준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지금과 같이 생활 상에서 일본어를 쓰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시절이라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까지는 그리 잘 쓰였던 용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에는 [[매니아]]나 재패니메이션 키드라는 단어를 즐겨 썼다. 또 TV 보급 초창기였던 [[박정희]] 시기부터 2002년 이전까지 지상파건 케이블이건 방송되는 일본 애니에 대해서 반드시 국내 기준에 맞게 개명할 것이라는 방침에 따라 일본 현지에서 사용되는 캐릭터 이름들이 모두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되었던 시절[* 심한 경우 1970년대에는 아예 위장 제작사명과 위장 국적을 써야 했다.]이라 오타쿠라는 말 역시 일어권에 속하는 편이라 그 당시까지는 오타쿠라는 말을 생활 적으로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오덕이라는 말도 쓰이지 못했다. 물론 다섯가지 덕(五德)이라는 말은 쓰이기는 했다. 게다가 그 당시까지는 대학 입시 경쟁 팽배로 인해 지금처럼 중고생 청소년들이 볼만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국내에서 방영하거나 비디오로 발매하는 것이 드물었던 편이었고 애니메이션이 나온다고 해도 심의 현실상[* 공윤 심의기준상 애니메이션 등급분류는 오로지 '연소자 관람가'나 '미성년자 관람불가' 뿐이지 중학생 내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은 경우는 없다.] 주로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들을 위한 아동용이나 아동성향이 짙어보이는 애니메이션이 전부였으며 지상파에서도 대부분은 아동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졌던 편이었다. 그런고로 청소년을 노렸던 국산 극장애니 《[[아마게돈(애니메이션)|아마게돈]]》이 실질 관람연령층 부재로 흥행에서 망한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고급 문화' 취급 받을 만도 했다. [[ADSL]]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전후이고, 일본 문화 수입에 대한 각종 규제가 풀리기 시작했던 것도 그 즈음이기 때문에, 그 이전인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오타쿠 문화를 즐기기 위해선 상당한 정보/지식과 경제력, 그리고 근면함과 체력도 필요했다.[* 훨씬 이전인 1980년대에는 재벌이나 부자가 아니면 일본 문화는 거의 못 즐겼다.] 인터넷, 게임을 분당 20원 내고 즐기던 [[모뎀]] 시절에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접속 프로그램들 중 이름 하나가 '오타쿠 인터넷'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오타쿠'가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설명되어 있었다. 근면성과 체력이 필요한 이유는 이때는 택배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고 숍에서 택배로 뭘 보내주는 일도 드물어서 발품을 팔아 작품을 찾아 다녀야 해서. 각종 PC통신 동호회가 유일한 정보/지식 교류의 장이었다. 지금도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소위 '덕질'이 가능한데 20년도 더 옛날은 중산층 이상은 되어야 경제적 여건이 되었다. 일단 PC통신부터가 매달 이용료와 비싼 전화비[* 시내전화도 날마다 올려댔으니 시내전화는 뭐... 물론 014XY는 산정구간이 넓었지만 오래접속하면 안되는건 마찬가지.]를 내야 했고 음성통화와 같이 쓰려면 회선을 하나 더 가설해야 했으므로 비용이 많이 들었다. ISDN같은 고속 통신망을 이용하면 전화세가 2배. 거기다가 야간정액제는 1997년부터 실시되었다. [[클럽박스]]나 [[웹하드]]는 물론이거니와 번역된 [[애니메이션]] 동영상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본만화도 《[[슬램덩크(만화)|슬램덩크]]》나 《[[드래곤볼]]》등의 인기작 말고는 [[해적판]]이 많았다. 1989년 드래곤볼이 정발되고 대히트를 치고 난 이후 일본 애니나 만화는 1991년부터 간윤의 사전심의를 통해 제한적인 수입을 허용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제한적으로 수입되는 일부 만화 이외, 혹은 그 이전에는 당연히 불법보따리 장수들이 몰래 들여오는 원서를 [[엔화|원가]] X 20배 정도의 바가지 가격으로 사서 봐야 했다. 《드래곤볼》조차도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다. 게다가 1998년 이전까지 PC통신 자료실에서는 내부 규정상 자체 삭제기준에 따라 일본어 애니 영상이나 일본어 노래조차 [[http://freespeech.jinbo.net/white/96/app11.html|업로드가 금지되어 있었다.]] 애니 역시 무조건 LD를 직접 공수해오거나 아니면 모처의 으슥한 불법 복사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 1개당 만원 정도의 비용을 내고 복사해서 봐야 했다(테이프값은 별도). 90년대 중반부터 학교 주변에 애니메이션 굿즈를 파는 가게가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거기에서도 살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용산 전자상가]]나 [[테크노마트]] 등에서 LD나 VHS에 한글 자막을 입힌 불법 애니 [[VCD]]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게다가 PC통신 동호회를 제외하면 자신의 취미를 공유할 사람들도 없었고, 대중 역시 일본 문화에 대한 막연한 반감은 있을지언정, 그게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다만 부산은 일찍 부터 일본 TV 전파[* NTSC-J의 VHF-Low 1, 2, 3CH는 NTSC-M의 유선 95, 96, 97CH와 동일하고 VHF-High 4, 5 ~ 11, 12는 NTSC-M의 유선 22, 일반 7 ~ 13CH, 유선 23CH와 동일하다.]가 잡혀서 일본 대중 문화를 접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는데, 웹툰 작가 [[seri]] 등 일부처럼 NHK BS2를 통해 일본 애니의 원어판을 우연히 접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소위 [[씹덕후]] 계열 [[양산형]] [[애니메이션]]의 붐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이런 시절이다 보니 그 당시에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오타쿠가 되려면 재력과 지식 수준이 필요했고, 실제로 초창기 오타쿠의 상당수가 [[금수저|서울 강남권, 주로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의 부잣집 아들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PC통신 동호회가 발달 했는데, 심지어 동네 빌딩을 빌려 동호회 사무실을 차리고 정기 상영회를 여는 등 오늘날에는 예술영화 동호회 정도에서나 하는 행사도 종종 벌였다, 그 시절(1994~98년경) 상영작을 보면 《[[AKIRA|아키라]]》, 《[[공각기동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초기 작품, 《[[반딧불의 묘]]》, 《[[카우보이 비밥]]》, 《[[마녀 배달부 키키]]》, 《[[그 남자! 그 여자!]]》 등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작품들이었다. 애니 관련 PC통신 동호회는 규모 면에서도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3대 PC통신망 어디든 전체 동호회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대형 규모로 성장했으며 감상회 외에도 정기적으로 애니 오프닝, 엔딩 비디오 클립과 OST 일부를 수록한 CD집을 제작, 판매하기도 했다.[* 하이텔의 애니메이트, 나우누리의 ANC(Animation and Cartoon) 동호회가 유명했다.] 일본 애니 외에도 국내 만화잡지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기도 했고 둘리 이후 라젠카까지 꾸준히 제작, 방영되었던 지상파 방송국의 국산 애니메이션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루는 등 종합 만화, 애니메이션 동호회의 성격이 더 짙었으며 애니메이션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보급의 첨병 노릇을 했다.[* 1세대 코스플레이어나 성우 동호회도 다 여기서 파생되었다.] 각주에도 써있지만 이런 활동이 모두 선구적인 오타쿠들만의 폐쇄적인 활동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꼭 각주에서 말하는 시네카테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1996~98년경 언급된 작품목록을 틀어주는 대학내 각 동아리의 크고작은 영화제는 많고도 많았다. 즉 이는 90년대 문화적 다양성에서 포착될 문제이지 오타쿠의 선구적 부분은 조금은 곁가지라 할 수 있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9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씨네마떼크'라는 사설 영화 클럽 활동[* 영화애호인들이 회비를 내고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은 영화들을 비디오테잎에 자막 입혀서 감상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지방도시에서 흥했는데, 그 상영작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이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딱히 오타쿠가 되기 위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아본 것은 아니고, 다양한 영화감상을 위한 활동이었다. 애니메이션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회원도 있었지만, 이 활동 자체가 이른바 [[덕질]]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오해다. 회원들의 대부분은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 회사원이었다. 90년대 말까지 이런 씨네마떼크 활동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영화를 접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여튼 당시의 오덕질을 요약하면, 1.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대한 지식 및 접근성 확보[* 물론 [[일본어]]에 대한 지식은 지금도 필요하긴 하다.] 2. 이를 뒷받침하는 재력과 시간 3. 이런 오덕질을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어디에서나 예외도 존재한다. 그 때도 남녀 청소년을 막론하고 [[야겜]]이나 미연시를 접하던 이들은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V-DOS 같은 프로그램을 써야 했고 작 시리즈, [[동급생]] 등 지금에는 고전 명작 취급 받는 게임이 주였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컴퓨터]]가 필요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는 대중들한테 필수품으로 여겨지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고딩들에게는 컴퓨터가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문화에 대해 폐쇄적인 탓에 일종의 신비주의가 만연하여 접한 탓이 크고, 이는 과거 중국에서 고대 청동기 유물을 수집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나 1960~70년대 한국에서 과시하려고 양담배를 피우는 것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어 접근성이 완화되자 신비주의나 희소성의 메리트도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1세대 오타쿠들은 다른 사치스러운 분야([[골프]], [[스포츠카]], [[시계]], [[와인]], [[오디오]], [[보석]])에 관심을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탈덕한 1세대들이 관심을 돌린 취미들의 급이 갑작스럽게 높아져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텐데 본래 1세대의 일본 애니 문화는 저런 사람들이 즐기던 것이다. 1세대 오타쿠들은 오타쿠가 일본에서 전문가로 통한다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던 세대였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공직자나 회사의 간부가 공공연히 일본의 애니/게임 문화에 대해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수백만원에 이르는 개인용 PC와 고정적인 지출을 필요로 하는 문화를 감수할 수 있는 재력은 주위사람에게 위화감보단 '일본 출장'이 가능한 능력자로 비춰진 것이다. 이는 90년대 중반 중국 시장이 열려 일본보다 중국 문화로 관심이 쏠리면서 1세대는 자연스럽게 태세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즉 인터넷보다는 PC통신이 대세이던 시기(90년대 중반~후반) 까지의 오타쿠 개념을 지금과 비교하면 의미보다는 용법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 때까지의 일본 애니메이션/게임 애호가들은 오타쿠 개념에 익숙했고 이에 관련한 논의도 활발하게 벌였음에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애니메이션/게임 애호가들 끼리 오타쿠라고 지칭하거나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자칭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즉 이 때의 오타쿠 개념은 공식적인 지면에서 혹은 논의의 맥락 속에서만 혹은 바다건너 일본의 누군가를 가리키는 용도로 존재했을 뿐 한국의 일본 애니메이션/게임 애호가들간에 지칭하거나 자칭하는 용도로는 쓰이지 않았다. 이 점은 지금도 접속 가능한 몇몇 만화와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의 2000년 이전 게시물이나, 90년대부터 활동했던 관련 분야 애호가들의 블로그, 전술한 seri 작가의 단편만화 《덕스러운 이야기》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글 속에서 '논의 대상으로서 오타쿠 개념'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있어도 자신을 오타쿠로 자칭하거나 혹은 대화의 상대방을 오타쿠로 지칭하는 일은 없다. 물론 이는 오타쿠라는 용어를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게임을 열성적으로 향유하는 태도 자체가 결코 비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며, 단지 일본 사회에서(90년대 당시 기준) 오타쿠라는 개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에 ― 즉 비하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는가 혹은 그렇지는 않은가 등 ― 관한 논란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 한국의 일본 애니메이션/게임 애호가들이 오타쿠 개념에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고 접근한 가장 큰 이유는 오타쿠를 '일본 특유의 개념'으로 간주했던데 있다. 즉 오타쿠적 문화 향유라는 것은 지극히 일본적인 현상이므로 일본에서 성장하고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 문화와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오타쿠인 것'의 중요한 전제 조건의 한 가지였다. 즉 아무리 일본 애니메이션/게임에 관련된 것들에 해박한 지식이 있더라도, 한국에 사는 한국인인 이상 (혹은 일본인이 아닌 이상) 오타쿠는 아니라는 관점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미국인이 대중문화에 심취하면 [[마니아]]나 [[긱]]으로 취급 받고, 한국인이 취미에 열중하면 그냥 단순히 애호가나 [[취미가]], [[빠순이]]로 볼 수 있는 등, 일본인이 그러하면 그냥 "오타쿠다" 라는 식으로, 즉 비하하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닌, 비교로도 예를 들 수 있다. 사실 당시의 사람들로 따지자면 그들이 일본 문화의 희소성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다른 고급 취미로 전이하게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오타쿠가 지칭하는 것처럼 일본산 2D 매체에만 진심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활동이 교양을 쌓는 여러 고급스런 문화활동의 일환 혹은 자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재밌는 놀이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물론 개중에서는 본격적인 1세대 코스플레이어로 진화하는 등 진심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여튼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흥미를 다른 고급 취미로 전이했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오타쿠라고 생각할 수는 없거나, 오타쿠라고 생각은 해도 뒷세대 오타쿠들과 같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